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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김소연, 문학과지성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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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애독자 작성일19-09-16 16:02 조회1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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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김소연, 문학과지성사, 2019.

 

김소연은 시인이다. 1993년 『현대시사상』에 「우리는 찬양한다」 등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여러 시집과 산문집을 냈는데, 내가 읽어본 건 시집 『수학자의 아침』 단 한 권이었다. 그마저도 내 마음을 건드리진 못했다. 하지만 읽은 게 한 권뿐이고 오래 들여다보지도 않았기에 그의 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처지는 못 된다. 그런데 그의 산문에 대해서라면, 몇 년간 서점에서 그의 산문집 몇 권을 들춰보고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곧잘 했다. 실행에 옮긴 건 이번 산문집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가 처음이다.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니, 책의 내용을 함축하는 게 표제라면 잘 지은 제목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랑'이 절체절명의 과제일 테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사랑은 그다음에 '타령'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좋을 만큼 그야말로 진부하고 식상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고달픈 청춘들에게는 감히 꿈꿀 수 없는 사치로 여겨질는지도…. 거꾸로 말하면, 사랑이란 멸종 위기의 종種을 보호하듯 절박하게 지켜야 할 가치라는 게 아니겠는가. 하도 가짜가 판쳐서 '참'이라는 접두사를 붙여야 할 정도로. 

 

'사랑'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멜로melo'는 원래 '노래'라는 뜻의 그리스어라고 한다. 멜로드라마는 노래가 곁들여진 연극인 것이다. 프랑스혁명 이후 흥행하기 시작한 멜로드라마는 기존의 정통극과 달리 통속성과 오락성을 내세웠다. 스토리텔링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이후로 대중이 가장 잘 몰입하고 가장 손쉽게 음미하는 소재가 되었다. 저자는 멜로드라마처럼 사랑을 도구로 삼아 사랑을 소비해온 문화들을 사랑의 적으로 간주한다. 사랑을 낭만적 영역이라 치부하고 탐구를 외면해온 시선 역시 사랑의 적으로 간주한다.

 

그렇다고 그가 이 책에서 '사랑'의 순수한 본질에 대한 논문을 한 편 쓴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 그가 만난 사람들, 일상에서 보고 느낀 여러 체험을 깊이 들여다보며, 사랑의 적들이 겹겹이 덧씌워 오래 가려진 사랑의 본래 얼굴을 찾고자 한다. 자신처럼 사랑에 대하여 무지한 채로 사랑을 했던 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소외되었던 사랑을 보듬으면서.

 

이 책을 두고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섬세한 통찰을 곳곳에서 발견할 때 '그래, 이거지' 싶었고, 그러한 통찰을 섬세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고유한 문체를 발견할 때 부러웠다. 직전에 읽은 700쪽에 달하는 『오버스토리』을 읽어내느라 뭉친 독서 근육을 풀어, 새로운 책 읽기로 나아갈 수 있도록 쉼이 된 책이었다.

 

 

▷ 책 속에서

 

세상에서 사람이 비루해지거나, 사람 앞에서 세상이 비루해지는 걸 자주 목격했다. 사랑이 그 비루함을 어떻게든 구원할 수 있다고 여겼다. 사랑의 뒤꽁무니를 좇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끝나면 다른 사랑을 이어가면서, 사랑에 의해 사람이, 혹은 사람에 의해 사랑이 마모되는 류의 사랑이 아니라, 단 하나의 사랑을 인간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그녀는 알고 싶었다. 어떻게 사랑을 시작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을 완성하는지를. 사랑의 무수한 결을 차곡차곡 조심스레 펼쳐서 잘 키워갈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랑을 기쁨을 만끽하기에 인간의 삶은 너무 길고,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인간의 삶은 너무 짧은 것 같았다. - '정말 알고 싶어서 묻는, 사랑에 대한 질문 하나'에서

 

우리는 아주 친밀한 사람에게 '가족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실재하는 가족은 특별함을 일찌감치 지나쳐 온갖 문제가 산적한 집합체가 되어 있다. 우리들 내면에 간직된 상처의 가장 깊숙하고 거대한 상처는 대부분 가족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 '개인의 서사가 상실된 장소'에서

 

서로를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좋아할 수 없는 사람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가 가족에게는 있다. 이 당위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보장해주면 좋으련만, 사랑이 지닌 위험으로 기울 때가 많다. 그래서 타고난 사랑의 능력을 훼손당하기도 하고, 인간을 무의식적으로 불신하기도 하며, 미지에 대한 당연한 불안에 내성이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사랑의 압력과 폭력에서 기인된 트라우마가 심장 깊숙이 각인되어버리기도 한다. 오래된 제도로서의 가족은 서로를 계속해서 희생해야만 존속될 수 있다. 개인의 서사가 두려움 없이 전달되고 이해되며 존중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 '개인의 서사가 상실된 장소'에서

 

우정도 사랑만큼이나 안전할 리 없고 평탄할 리 없다. 강렬한 격정도 없이, 독점역도 없이 그러했다. 왜냐하면 우정에도 권력이 미묘하게 침투하기 때문이다. 영향력이라는 권력. 우정의 이면에 밴 질 나쁜 영향력이 관계를 훼손할 때가 많았다. "너는 걔를 잘 몰라." "걔를 조심해." "걔는 원래 그런 애야." 충심에서 우러나온 듯한 말로, 소중한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그런 경고를 취한 사람에게 불순한 의도를 감지하기는 어렵다. 불순한 의도가 없다고 스스로를 우선 속이므로. - '대화는 잊는 편이 좋다'에서

  

한 사람이 ○라고 말한다. 한 사람은 ×라고 대답한다. 한 사람이 다시 ○라고 말한다. 한 사람은 다시 ×라고 대답한다. 한 사람은 다시 표현을 조금 바꾸어 ○라고 말한다. 한 사람도 표현을 조금 바꾸어 ×라고 말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만을 말하고, ×라고 말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만을 말한다. 표현을 바꿔가며, 예시를 바꿔가며, 관점을 바꿔가며 서로 끝없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 - '대화를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에서


한 사람이 ○라고 말한다. 한 사람은  ×라고 대답한다. 한 사람이 다시 ○라고 말한다. 한 사람은 말을 고쳐 △라고 대답을 한다. 한 사람이 다시 ○라고 말한다. 한 사람은 또다시 말을 고쳐 □라고 대답한다. 한 사람이 다시 ○라고 더 명료하게 말한다. 한 사람은 마침내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 '대화를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에서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혼자를 누리는 일'에서(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재인용)


그녀는 외롭지만 그게 참 좋다. 홀홀함이 좋고, 단촐함이 좋고, 홀홀함과 단촐함이 빚어내는 씩씩함이 좋고 표표함이 좋다. 그래서 그녀는 되도록 외로우려 한다. 그게 좋아서 그렇게 한다. 그녀에게 외롭지 않은 상태는 오히려 번잡하다. 약속들로 점철된 날. 말을 뱉고 난 헛헛함을 감당해야 하는 나날. 조율하고 양보하고 희생도 감내하는 나날. - '혼자를 누리는 일'에서


나는 내가 가둔 자이며, 나는 나를 가둔 자다. 눈앞에서 열쇠를 흔들며 내가 죄수임을 상기시키는 간수이자, 간수의 관심을 얻고자 구석에 웅크린 채 옴짝달싹하지 않는 죄수다. 나는 나의 영원한 숙적이다. 세상의 피곤하고 추악한 모든 것과 결별하고 싶지만, 죄수이자 간수인, 숙적인 '또 다른 나'와 결별하는 게 우선일지 모른다. 어설픈 현자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여정이 곧 삶이라고 우리를 속여왔지만, 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해야 하느나 여정이 곧 삶일지도 모른다. 나를 맴도는 어설프고 주눅 든 나, 나에게 해로운 것만을 달콤하게 권하는 협잡꾼인 나, 나에게 위선 아니면 위악만을 가르치는 감독인 나, 나에게 거짓 눈물과 거짓 한숨과 거짓 웃음을 사탕처럼 던져주는 사육사인 나, 그래서 무엇을 하며 살아도 어딘지 모를 불안과 불쾌감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나. 그 모습을 비웃는 구경꾼인 나. 그러 나와 결별을 하기 위해서 내가 나라는 사실을 포기하는 것만이 방법일지도 모른다. 꽃나무가 더 이상 꽃나무이기를 포기하는 꽃 지는 계절처럼, 장마가 더 이상 장마이기를 포기하는 쨍한 다음 날 아침의 맑은 하늘처럼. 포기와 체념의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을 알려면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더 현명한 환멸에 도착한 이후여야 하리라. -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능력'에서


내가 궁금했던 것은 사랑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사랑함에 대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함은 사랑과는 다른 얼굴이어야 한다. 사랑은 사랑을 재배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사랑을 돌아보고 돌보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을 사랑해온, 사랑을 명사로 고정하는 사랑의 담론들에 비켜서서, 사랑이 더 이상 감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게 내버려두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학습해온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힘도 없다. 하지만 사랑함은 그렇지 않다. 삶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세상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 에필로그 '사랑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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