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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 건축가 승효상의 수도원 순례》, 승효상, 돌베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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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애독자 작성일19-12-10 21:28 조회1,3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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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 건축가 승효상의 수도원 순례》, 승효상, 돌베개, 2019.


동숭학당의 다섯 번째 여름 기행: 로마에서 파리까지 2,500여 킬로미터의 수도원 순례를 담은 기행.


동숭학당은 2014년에 건축가 승효상이 만든 강좌 형식의 모임이다. 1년 단위로 운영되는데, 연초에 운영위원회에서 1년의 주제를 정하고, 이 주제와 관련해서 건축·미술·문학·영화·음악·공연·사회·역사·과학 등 학문 전반에 걸쳐 적합한 강사를 선정한 후 20회 가까운 강좌를 확정한다. 반半공개로 모집한 학생 60명을 대상으로 매월 두 차례 강의를 진행하고, 주제에 맞는 해외 장소를 택해 열흘가량 여름 기행을 하고, 가을에는 국내 답사 여행을 한다.


2014년에는 '거주'를 주제로 '죽은 자의 거주 풍경'을 찾아 바르셀로나를 기점으로 해 지중해 연안과 이탈리아 티치노 지역의 공동묘지를 파헤치고 다녔다. 2015년에는 '장소'를 주제로 영국과 아일랜드에 있는 문학의 장소를 답사했다. 2016년에는 '풍경'을 주제로 모로코 아틀라스 산맥을 종주하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문명이 남긴 달빛 풍경에 한껏 취했다. 2017년에는 '기억'을 주제로 그리스 바다에서 기억과 신화 속, 자유를 향한 행선을 더듬어봤다. 2018년의 주제는 '공간'이었다. 수도원 기행을 하자는 오랜 요청이 있었는데, 마침 이 주제와 잘 맞았다. "수도사들이 일상의 공간을 떠나 굳이 광야나 산속으로 들어가 밀폐된 공간을 찾는 까닭을 살피고 그들의 영성으로 충만한 공간을 탐문하는 일은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을 반추하여 성찰하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승효상은 이 기행의 제목을 '스스로 추방당한 자들의 공간, 그 순례'라고 붙였다. 수도원 기행 참가자들을 정한 다음, 기행 두 달 전부터 안내를 시작해 평균 일주일에 한 번씩 모두 여덟 차례의 글을 보내며 스스로 준비하게 했다니, 대단히 철저하다. 불쑥 떠나는 여행도 나름의 맛이 있지만 준비한 만큼 얻는다는 사실은 건축가로서 오랜 시간 많은 장소를 기행하고 답사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리라. 그는 순례를 떠나기 전 참가자들에게 필립 그로닝 감독이 찍은 영화 〈위대한 침묵과 막스 피카르트가 쓴 《침묵의 세계》를 먼저 보도록 권한다. 나는 위대한 침묵을 조느라 끝까지 보지 못했고, 침묵의 세계도 읽다가 말았다. 공통점은 그럼에도 그 영화와 책이 좋아서 두고 봐야겠다 생각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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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기행 중 설명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이 기행은 로마에서 파리까지 2,500km의 장거리를 오가는데, 세부 장소는 다음과 같다. 로마 - 바사노 로마노 - 아시시 - 시에나 - 산 지미냐노 - 갈루초 - 피렌체 - 루카 - 제노바 -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 - 생 폴 드 방스 - 빌뇌브 루베 - 르 토로네 - 고르드 - 생 레미 드 프로방스 - 아비뇽 - 그르노블 - 생 피에르 드 샤르트뢰즈 - 리옹 - 에브 - 클뤼니 - 아르케스낭 - 벨포르 - 롱샹 - 베즐레 - 바르비종 - 파리. 몇 군데를 제외하고 나에게는 모두 낯선 장소이다. 오래 전 읽은 소설가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공지영도 이 기행의 참가자였다). 건축가인 저자 고유의 관점을 들여다볼 수 있었으나, 내가 건축을 몰라서 다 알아듣지 못한 점도 있다. 기대하며 읽은 것만큼 새롭고 놀라운 감동은 없었으나, 그의 글과 사진을 통해 이국의 낯선 풍경, 그러나 어딘지 익숙한 수도자의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과거 여행 경험이 많지 않고, 현재는 소임지에 묶여 (내 스스로) 수도자의 일상을 살아가기에 이런 기행은 나에게 미지와 선망의 대상이다. 책으로나마 간접적으로 수도원 기행을 해볼 수 있었다고 위안하지만. 말 그대로 위안일 뿐. 기행문을 통한 간접 체험이 직접 나서 기행하는 데 비할 바는 못 된다. 이 책의 저자도 참가자들에게 순례 가이드북을 만들어 나누어 주며 "길을 떠나기 전에 이 책자로 방문하는 장소를 우선 상상하게 되면, 실제 현장을 만나는 일은 사전 지식 없이 조우할 때와 비교되지 않는 극적 감동을 주며 그 기억은 오랫동안 남는다" 했다. 말하자면 나는 가이드북만 읽고 길은 떠나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한 삶인 걸. 나는 내가 선택하고 나에게 허락된 자리에서, 스스로 추방당한 사람으로서 자유를 누려야지.


그는 이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이 책이 수도원 순례 안내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먼 길 떠나지 않더라도 제자리에서라도 호흡을 가다듬고 잠시 비켜설 수 있게 하는 작은 동기가 된다면, 나는 너무도 만족할 것이다. 결국, 세상의 경계 밖으로 스스로 추방당한 이들에게, 그 믿음과 결단에 경의와 사랑을 표하며 이 책을 바친다."

 

(참, 지난 9월 그가 건축한 명례성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인연으로 이제민 신부님이 추천사도 쓰신 듯하다. 시간이 많지 않아 오래 머물지 못했지만,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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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 그(에드워드 사이드, 1935~2003)가 쓴 다른 책 『지식인의 표상』(1996)에서 지식인을 정의하길, 경계 밖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추방해야 하는 자라고 했다. 그리고 지식인이 되려면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계급과 인종에 관한 의식, 성적인 특권에 의문을 제기하여야 하고,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되 모험적인 용기의 대담성과 변화의 표현을 지향하고, 가만히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며 나아가는 것에 반응하는 자여야 한다고 단호히 말했다.

   … 건축가가 되려면 그래야 했다. 자기 집이 아니라 다른 이의 집을 지어주는 일을 직능으로 가지는 건축가는 자신을 타자화시키고 객관화시켜야 한다.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새로운 땅에 내가 가지고 있는 타성과 관습의 도구를 다시 꺼내어 헌 집을 그리는 것은 건축이 아니라 관성적 제품을 만드는 일이며, 새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소망을 배반하는 일이다. 새로움에 반응하고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는 건축가에게 경계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 소임을 파기하는 일과 다르지 않으니, 외로움과 두려움은 건축가에게 어쩔 수 없는 친구일 수밖에 없다. (제7일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하는 자)

 

- 이 상업주의에 대항하는 힘은 무엇일까. 바로 영성이었다. 그렇다. 자본의 힘이 아무리 세다 해도 작은 영성 하나를 감당하지 못한다. (제11일 완전한 침묵 속에서만 듣는 것이 시작되며, 언어가 사라질 때에만 모든 것이 시작된다)

 

- 존 B. 잭슨의 『폐허의 필요성』에서 "폐허는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근원을 제공하며, 우리로 하여금 무위의 상태로 들어가 그 일부로 느끼게 한다"라고 했다. 폐허를 갈 때마다 내 머릿속에 맴도는 문구다. 다른 말로 하면 건축과 도시의 종착점이 폐허라는 것이다. 우리가 폐허에 서면 자못 비장해지는 이유가 우리의 종말을 보는 듯하기 때문이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건축의 본질과 우리 삶을 다시 성찰하는 계기를 가진다. 잭슨은 그 글의 끝에 다시 이렇게 적었다. 역사는 중단함으로 존재한다. (제12일 나는 저승을 믿지 않는다)

 

- 따지고 보면 예수는 좌파다. 그것도 채찍까지 휘두르며 상업주의와 물질주의를 적극적으로 배척한 행동가였으니, 요즘 말로 하면 극렬 좌파다. 그는, '나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기존 체제를 인정하지 아니했고, 부자에게 천국 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일보다 어렵다고 일갈했으며, 어둠에 처한 자와 가난한 자, 과부, 고아, 이방인을 껴안으며 사랑했다. 철저히 반체제 인사였으며 민심을 교란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혁명가요, 사상가였으니 늘 세상의 경계 밖에 스스롤르 위치시켰다. 그러나 그의 말과 행위가 다 옳아서 모두가 메시아로 그를 받들려 할 때, 예수는 또다시 그들이 사는 세상의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영원히 추방하여 불멸이 되었다. 결국 그를 따르는 기독교가 탄생했으며, 그로 인하여 천지는 개벽하고 만다. (제13일 건축은 빛 속에 빚어진 매스의 장엄한 유희)

 

- 현장에 진실이 있다고 주장하는 나는 이 명분으로 세계 곳곳을 숱하게 돌아다녔다. … 혹시 틈이 생기면 그곳에서 가까운 수도원과 묘역을 찾는 습관이 생긴 지가 꽤 오래다. 이 두 시설에 소위 꽂혔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 둘은 비슷한 성질이 있다. 이들이 위치한 지역의 풍경이 늘 아름다워 먼 길을 찾아간 자의 수고를 충분히 위로한다는 점도 있으나, 그보다는 둘 다 세상을 등진 이들을 위한 시설이라 그들이 지닌 스산함이 마냥 나를 이끈다. 그들의 삶을 빌려 내 육신의 비루함을 잠깐이라도 잊고 삶의 근본을 다시 확인하게 하니 길 떠난 자에게 이만한 보상이 없다. 또 하나 있다. 무덤은 대개 그 지방 고유의 집을 축약한 형태며 수도원은 가장 기초적 형식의 건축이라서, 건축하는 내게 늘 본질을 각성하게 한다. (순례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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