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1 서브비주얼

《걷기의 인문학》, 리베카 솔닛, 반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유프라테스 작성일20-04-14 10:20 조회1,504회 댓글1건

본문

973921e8ff5e83b95a86b84253388247_1586827 

 

날이 풀리고 꽃과 잎이 돋아나 햇볕도 바람도 사랑스러운 시기입니다. 평소 집순이생활을 즐기는 저도 꽃놀이와 등산 등 야외에서 움직이기 좋은 때다보니 괜스레 몸이 들썩거립니다. 그렇지만 불필요한 외출을 자제해야 하는 만큼. 마음만이라도 달래 보려 했습니다만, 마침 꺼내든 책은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탈핵반전여성 운동가이자 작가인 리베카 솔닛은 약 이십 년 전의 어느 날, 시위행진에 참여했다가 친구의 제안으로 걷기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걷기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고, 그 속에서 나타난 변화, 그리고 그 변화의 표상인 예술 작품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보행이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인간은 양손을 자유롭게 쓰고 도구를 사용하면서 두 발로 걸었습니다. 자신의 다리 외에 어떠한 이동 수단도 없었던 때, 인간은 목적지까지 이동하기 위해서 당연히 걸어야 했습니다그 이후, 마차나 자전거 등 다른 교통수단이 등장하며 전적으로 사람들이 이동하기 위해 걷기 외의 다른 선택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자, 보행은 새롭게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걷기는 생각과 연결되었습니다.

 

보행의 리듬은 생각의 리듬을 낳는다. 풍경 속을 지나가는 일은 생각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이면서 자극제이다.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진다고 할까,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할까. 마음에 떠오른 생각은 마음이 지나는 풍경의 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일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는 어딘가를 지나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보행의 역사가 생각의 역사를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들은 소요학파peripaeticonist’라 불릴 정도로 걸어 다니면서 철학적인 논의를 했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 스스로 걸음이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라고 말할 정도로 걷기를 일삼는 사람이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댈러웨이 부인등에서 걸어 다니며 많은 생각을 하는 자신을 글로 표현해냈습니다

이처럼 유명한 사람들만 보행의 특권을 누린 것은 아닙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걸음이 역사적 사건이 된 경우로는 프랑스 혁명 때 모인 파리의 여인들, 베를린 장벽 근처로 모여든 동독 시민들, ‘프라하의 봄’ 때 '5월 광장 어머니회'와 함께 걸어 나온 시민들을 들 수 있습니다. 개인의 걸음이든 장삼이사들이 함께 모여 간 걸음이든, 그 걸음들은 소소한 것으로 사라지지 않고 역사와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걷기’라는 동작 자체는 단순하고 거의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을 따르지만, 이처럼 다채로운 생각이 더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역사와 문화의 맥락에 따라 걷기에 대해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자기 발로 직접 걷는 것을 천시하고 위험하다 여기던 시대도 있었지만, 교외를 걷는 여행이 점차 낭만으로 여겨지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번화한 도시 속에서의 걷기는 이전에 비해 더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지만, 자가용 운전이 더 보편화되자 사람들은 보행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걷기는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서야 시도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걸을 때의 리듬을 의식하지 않는 것에 대해, 솔닛은 보행이 노동과 활동 그 중간에 위치한 행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걷는 것은 달리기나 뛰기에 비해 적극적이지 않은 행위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인 우리는 굳이 걸음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키워 갑니다. 십자가의 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 등 일정한 장소를 같은 경로를 통해 걸어가고 이를 순례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솔닛은 순례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중요한 일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을 하는 방법,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따라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행동을 흉내 내는 연기가 아니라, 그 누군가의 영혼을 닮기 위한 노력이다. 순례가 다른 모든 보행과 다른 점은 이렇게 반복과 모방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근래에 들어 솔닛은 보행이 점점 어려워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걷기는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할 정도입니다. 많은 공간이 보행자 위주가 아닙니다. 자동차 사용을 전제로 설계된 도시에서 보행로는 끊겼고, 공원처럼 걸어 다닐 수 있는 열린 공간이 줄어들었습니다. 길을 뺏긴 사람들은 대신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타는 것으로 걸음을 이어갑니다. 현대 도시에서의 걸음은 그래서 기계적이고 사색 없이, 단편적입니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계속 걸어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정 사회에서는 여성아동노인장애인성소수자 등에게는 집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 도전과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우리는 보행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걸음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기록으로 남기려는 행위예술가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의 수단으로 걷기를 선택해 나온 사람들, 행진과 축제 등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동참하여 걷는 사람들까지, 이들을 보면, 걷기는 사회를 엮는 힘이 지녔음을 되새기게 됩니다.

 

한국어판을 위한 작가 서문에서 솔닛은 대립하고 있는 듯한 두 항이 보행을 통해 하나로 연결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 

 

결국 누구를어떻게 걷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뒤따릅니다​. 날이 너무 좋아서 무작정 걷고 싶은 날입니다. 이 어려움이 한 숨 지나고 난 뒤에는 이전과는 다른 곳을 찾아 갈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걸음은 이전과는 다른 자취를 남기게 되겠죠. 그때에 우리는 누구와 어디를 어떻게 걷고 있을까요?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지연안나님의 댓글

지연안나 작성일

요즘 매일 걷고 있는데, 생각하며 걷는 즐거움이 분명 있어요 ㅎㅎ 
누구를 어떻게 걷게 할 것인가? ㅎㅎ 저는 누구도 좋지만, 제가 어떻게 걸어야 하나.. 고민이에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