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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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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20-03-23 17:53 조회1,160회 댓글0건

본문

 

1. 사도행전은 어떤 책인가?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지만제목과는 달리 개별적인 사도들의 활동이나 생애와는 관계가 없습니다사도들 중 오직 두 사람베드로와 바오로의 선교 활동을 대표적으로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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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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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루카 복음서와 비슷한 머리말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루카 복음서를 쓴 인물이 사도행전을 집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80년경에 작성된 무라토리 경전 목록과 2세기 후반에 활동한 이레네오 주교의 저서 《이단 반박》을 바탕으로, “사도 바오로의 협조자”(필레 1,24; 2티 4,11) “의사 루카”(콜로 4,14)를 집필자로 추정해 왔지만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현대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사도 바오로 이후에 활동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자료를 바탕으로 사도행전을 저술했다고 보고 있습니다팔레스티나 지리와 관습에 정통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다른 민족 출신의 그리스도인으로 추정합니다.

 

집필 연대

80년경에 루카 복음서가 집필되었다고 보면그 후속 편인 사도행전을 집필하는 데는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하므로 80~95년경에 집필되었으리라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2. 사도행전에 나오는 연설

 

연설은 사도행전에서 1/4 분량으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연설한 인물별로 구분해 보면 스물네 번의 연설 중에서 베드로가 여덟 바오로가 아홉 번 연설합니다그렇지만 이런 연설은 대부분 이야기의 진행과는 무관하게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따라서 연설은 사도행전 저자의 집필 의도와 목적을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사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들로 하여금 연설을 하게 함으로써그 사건 안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의미와 진실을 밝히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사용하였던 것이죠그 당시는 웅변학(수사학)이 가장 꽃을 피웠던 시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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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하는 바오로, 16세기모스크바 안드레이 루블료프 미술관 소장]

 

 

 

3. 내용

 

1) 교회의 탄생(1,1-5,42)

신약성경 저자 가운데 루카만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구분하여 두 차례 기록하였습니다(루카 24,50-53; 사도 1,9-11). 루카에 따르면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 시대를 마무리하는 사건이자 성령강림을 통해 교회 시대가 시작될 것을 예고하며 재림을 예시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사도 2,42에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친교빵 나눔과 기도에 전념했다고 합니다여기서 ‘사도들의 가르침이란 예수님의 삶과 죽음부활과 승천 사건에 관해 사도들이 직접 겪었던 일들을 가리킵니다이런 가르침이 몸에 배었기에사도들은 훗날 최고 의회 법정에 불려나갔을 때에도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힘차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2) 박해와 성장(6,1-11,18)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다인이었으나해외로 이민갔다가 고국으로 되돌아온 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아람어보다 그리스어에 더 익숙했을 뿐만 아니라성전과 율법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6,11-14; 7,48-50). 이로 말미암아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후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북쪽 지역으로 피신함으로써 복음이 널리 퍼져나가게 됩니다. 유다인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색출해 내기 위해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 하늘에서 번쩍이는 강한 빛이 비추이는 극적인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납니다.

 

3) 세 차례 선교 여행(11,19-21,16)

안티오키아 교회는 그리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사도 11,26). 사도들은 그들이 받아들인 신앙이 참된 신앙인지 점검하고 예루살렘 모교회와 새롭게 생겨난 지역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서 바르나바를 파견했습니다(사도 11,22). 교도권과 지역 교회와의 일치가 이때부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때 바오로는 바르나바의 초청을 받아 함께 일하게 됨으로써(사도 11,25),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선교 사명을 받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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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선교 여행

안티오키아 교회를 기반으로 바르나바그의 사촌 요한 마르코바오로가 선교 여행을 떠남으로써 다른 민족이 많이 입교하자, 다른 민족 출신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유다교의 율법 준수를 요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생겼습니다그래서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49년경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하고, 다른 민족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합의함으로써그리스도교가 유다교로부터 독립하는 기틀을 마련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의 한 종파로 인정되었을 경우와는 달리 독립된 종교가 된다는 것은 더는 로마제국이 유다 민족의 종교로서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그래서 그리스도교는 후에 로마로부터 쫓겨나고박해를 받게 됩니다.

 

 2-3차 선교 여행

2차 선교 여행 때 사도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별도로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소아시아(현재의 터키 일대)에서 선교하다가 마케도니아로 가라는 계시를 받고는필리피, 테살로니카베로이아, 코린토 교회를 창립했습니다. 3차 선교 여행 때는 선교지 교회를 둘러보는 가운데 에페소에서 27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유럽 대륙에 첫 번째로 세운 필리피 교회는 사도 바오로가 선교를 계속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유일무이한 교회였습니다.

 

 

4) 예루살렘에서 로마로(21,17-28,31)

사도 바오로는 선교 여행에서 돌아와 성전에 갔다가 아시아 출신 해외 유다인들의 난동으로 로마군에게 체포되어 투옥됩니다이후 총독의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되자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황제에게 상소합니다(25,1-12). 로마 시민권자는 정당한 절차 없이 체포할 수 없었으며억울할 경우에는 황제에게 상소할 수도 있는 권리가 보장되었습니다이리하여 ‘말씀의 길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로유다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방인들에게로 뻗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출처월간지 <성서와함께> 2003년 12월 333 

http://www.with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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