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1 서브비주얼

<영화 “밀양”, 용서에 대하여-“너희가 무엇이든 땅에서 풀면…”>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20-09-14 14:22 조회968회 댓글0건

본문

<영화 “밀양”, 용서에 대하여-“너희가 무엇이든 땅에서 풀면…”>

 

 

[출처]https://blog.naver.com/gaiavox|작성자 대지의소리 gaiavox

2d45ddc2799ba46a53e6cf40cb5f6eea_1593331 

송인석 미카엘 신부

 

 

영화 [버닝(burning)]에 이어 또 한번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를 다뤄볼까 합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입니다. 이창동 감독님이 연출하고, 배우 전도연 씨가 주연을 맡아 칸 영화 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던 작품입니다.

 

 

3652eb43506c6a44ce78295ea81f0080_1600060

 

영화 [밀양] 포스터 

 

이청준 작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밀양] 속에는 종교에 대한 날카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성찰, 그리고 인간의 ‘고통’과 ‘용서’ 그리고 ‘구원’에 대한 묵직한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얕게나마 영화 [밀양]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인 ‘용 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볼까 합니다.

 

1. 용서는 어떻게?

 

먼저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7’이라는 숫자가 이스라엘 사람에게 ‘완전함’을 상징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일흔입곱 번 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결국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 용서의 대상이 내 가족을 죽인 원수라면? 그 용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영화 속 신애(전도연)는 남편과 사별을 하고,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 옵니다.

 

그녀는 이미 삶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아들 ‘준’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합니다.

 

한때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던 그녀는 작은 피아노 학원을 차려가며 악착같이 살아보려 합니다. 자존심이 센 신애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동정받거나 무시당하는 게 싫습니다. 그래서 되려 더 ‘있는 척’, ‘괜찮은 척’, ‘넉넉한 척’ 하며 여기저기 땅도 알아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유괴되는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 아들마저 잃게 된 그녀는 제대로 살아갈 힘도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렇게 망연자실한 채 초점 없이 살아가던 그녀에게 문득 현수막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

 

살아갈 힘을 모조리 잃고 주저앉았던 그녀를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종교’였습니다.

 

뭔가에 이끌린 듯 찾아간 개신교 부흥회 안에서 그녀는 마음속 모든 응어리를 토해내듯 통곡 을 합니다. 그리고 ‘치유’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이후 그녀는 교회 예배와 교우 모임에도 참석하면서 조금씩 평화를 찾아가는 듯합니다.

 

“그렇게 이 가슴이 누가 손으로 막 짓누르는 것처럼 많이 아팠는데요. 이젠 안 아파요. 평화 를 얻었어요. 이젠 정말 저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뤄진다는 것을 분명히 믿게 되었어요.” (신애의 대사)

 

너무나 급하게, 그리고 어딘가 불완전하게 괜찮은 척하는 신애의 모습이 오히려 더 불안해 보 입니다. 슬픔을 억지로 밀어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유괴범을 만나보겠다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 을 용서하라는 성경 말씀에 따르겠다는 겁니다. 왠지 그래야만 자신도 완전한 평온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느꼈나 봅니다.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는 유괴범이 있는 교도소로 면회를 갑니다. 그리 고 용기를 내서 그를 마주합니다.

 

그런데 유괴범으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듣게 됩니다. 그녀로서는 정말로 괴상한 이야기 였습니다.

 

“저도 믿음을 가지게 됐거든요. …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 지은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 았습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녀는 좌절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피해자인 그녀는 아직 그를 제대로 용서한 적이 없는데, 그래서 정말 큰 용기를 내서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그를 찾아왔는데 … 가해자가 한다는 말이 자신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합니 다. 하느님이 다 용서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미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였습니다.

 

그는 정말로 용서받은 걸까요? 그것은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자세와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순서가 잘못되었습니다.

 

“땅”에서 먼저 풀지도 않고서, “하늘”에서 풀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 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그가 올바로 죄를 반성하고 통회했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 의 죄를 진심으로 반성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먼저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았을 그 누군가를 기 억하며 아파하고, 그래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땅에서 매인 매듭이 풀릴 때, 비로소 하늘에서도 풀어주십사 감히 청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고해성사를 드리는 태도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고해성사 안에서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이런 식의 개인 고백 을 수반하는 현행 고해성사 방식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규정한 이후부터 확실히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를 통해 고해성사가 일곱 성사 중 하나로 선포됩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해성사의 기원이, 공동체 안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고 백하고 서로 용서하는 모습의 형태였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죄의 고백과 용서에 있어서 “땅의 매듭 풀기”를 생략하는 과정(마치 ‘마술’과 같이 성사를 받아들이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겁니 다. 땅에서 매여 있으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화해의 장”이라는 “의미” 는 잊히고 “당위와 형식”만이 남게 될 때, 그렇게 수단과 목적이 뒤바뀔 때, 고해성사는 자칫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성사 숙제”나 “짐”처럼 여겨질 위험이 있습니다.

 

2. 희망은 어디에?

 

다시 영화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신애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쓰러지고 맙니다. 그 이후로 신애는 예전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아집니다.

 

너무나 쉽게 그를 용서해 준 ‘하느님’에게, 자신이 용서할 권리를 빼앗아 간 그 ‘보이지 않는 신’에게 그녀는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안 하던 도둑질을 하고, 집사의 남편인 장로를 유혹하여 불륜을 저지르게 합니다. 보란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이지요.

 

목사가 신도들을 모아놓고 기도하는 집회 현장에서 음향장비를 조작하여 <거짓말이야> 노래 를 틀어버리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주 제멋대로 ‘사랑’과 ‘용서’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말을 여기저기 갖다 붙이고 해석하는 종 교와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조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던 그녀는 결국 자해까지 하게 됩 니다.

 

스스로 손목을 그어 피를 흘리던 그녀는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며 도 움을 청합니다. 이 모습은 역설적으로 신애에게 큰 전환점이 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으로 ‘~척’이 아니라, 자신의 아픔을 타인에게 드러내고 도움을 구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오랜 기간 치료를 받게 되고, 영화는 그녀가 퇴원하는 날,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을 헤피엔딩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줌의 희망은 희미하 게나마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거울 장면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대면하게 됩니다. 지금껏 자주 현실을 부 정하고, 자신을 포장하며,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밀어냈던 그녀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그리고 늘 그녀 곁을 지켜주었던 종찬이 그 ‘대면’을 돕습니다.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자립’ 의 모습과 타인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는 ‘수용’의 모습이 함께 보입니다.

 

카메라는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땅에 떨어져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비춥니다.

 

그리고 그 지저분하고 그늘진 마당 바닥 한 켠에 드리워진 한 줌의 햇살과 그림자를 함께 보 여주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 제목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영화 초반에 신애는 [밀양]의 뜻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비밀(밀), 볕(양)-“비밀의 햇볕”이라고 말입니다.

 

그 “밀양”(숨겨진 빛)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일까요?

 

확실히 “이거다!” 하는 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각자 자기 삶에서 찾은 나름의 믿음과 해석이 있을 뿐일 겁니다. 다만 이창동 감독이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그 “비밀의 햇볕”에 대하 여는, 그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 힌트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우리가 아직 이런 번뇌의 땅에 살고 있겠나. 왜 우리 삶에서 고통이 끝나지 않겠나. 종종 신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게 역사하지 않나. 만약 햇볕이 신의 뜻이라면 비밀스럽게 작용한다. 신의 뜻이 뭔지는 정말 알 수가 없다. 근데 어쨌든 그녀는 이 땅에서 구원받으려 하고 구원을 찾으려 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여기서 살아야 하니까.

   다른 건 모르지만 이거는 느낄 수 있다. 적어도, 내게 생명이 있다는 것. 내 이 몸뚱어리 하 나에 피가 끊임없이 순환하고, 이게 이 생명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 이건 놀라운 거고 이건 기적이다. 아마 구원이나 희망이 있다면 이 생명을 받아들이는 데 있겠지. 내게 이런 이야기 를 해준 분도 사실은 우리 영화의 솔밭 기도 장면에서 예배를 이끌어주신 목사님이다. 그 목 사님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고, “신애라는 주인공 개인에게 구원이 있다, 신의 힘이 작용한 다”고 봤다더라. 구원이란 자기 생명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니까. 내가 생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선희 기자와 이창동 감독의 인터뷰 내용 중)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