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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문화_소돔과 고모라를 찾아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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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18-09-23 00:59 조회1,5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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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문화

 

소돔과 고모라를 찾아서

김성

 

김성님은 협성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이자 같은 대학 성서고고학 박물관장으로성서고고학과 성서지리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의인 열 사람이 없어 유황과 불로 멸망했다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수많은 성서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두 성읍은 고고학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천재지변으로 파괴된 유적으로, 화산 폭발로 재 속에 파묻힌 지중해의 테라 섬이나 이탈리아의 폼페이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그 위치를 찾기 위해 몰두해 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누구도 두 성읍의 위치를 자신 있게 밝힐 수 없었기에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역사성이 없는 허구적 신화로 일축되기도 한다.

 

한편 비교적 수심이 얕은 남쪽 사해가 역사 시대 이후에 생겨났다는 학설에 근거하여, 원래 그곳에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는데 북쪽 사해 물이 넘쳐흘러 들어와 완전히 물에 잠겼고, 지금도 사해 바닥을 발굴하면 불에 타 멸망했던 옛 성읍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주장이 제기된 적도 있다. 19세기 이래로 이스라엘 지역에서 성지의 대부분을 지리상으로 확인하려는 전통이 시작되어, 사해 서쪽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찾으려 하였다. 그 결과 소돔 산이나 롯의 아내의 기둥등이 생겨났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에 따라 특이한 지형지물에 이름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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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논 골짜기(와디 무집)]

사해의 동쪽 지역은 조금 넓은 집수 유역 덕분에 수량이 풍부한 여러 개의 강이 사해로 흘러 들어온다. 따라서 일찍부터 샘과 하천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정착지가 형성될 수 있었다. 요르단 지역의 가장 험난한 아르논 골짜기는 사해로 들어오면서 절벽과 협곡을 이루고 있다.

 

1만 년 전 사해 주변의 선진 문명

1920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사해 북동쪽의 고대 유적지 툴레일랏 엘가술을 발견하면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고고학 탐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곳에 인류가 최초로 주거한 흔적은 7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기원전 4300년경부터 이 유적지는 이스라엘의 동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가술 문명으로 불릴 만큼 지역 문명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표 유적으로 기원전 4000년경 건설된 신전이 있으며, 대형 별이 등장하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벽화는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의 백미로 손꼽힌다. 고도로 발달된 가술의 문명과 전통은 그곳에서 북서쪽으로 15km 떨어진 예리코에서 비롯되었다. 고고학에서 성읍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주거지인데, 이미 1만 년 전에 예리코라는 성읍에서 망대와 성벽을 건설하여 문명을 이룩했다는 사실이 지난 1950년대에 이뤄진 발굴로 밝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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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소동(?), 밥 에드라]

만일 아브라함 시대를 중기 청동기 ||시대, 즉 기원전 2000년 이후로 본다면 소동과 고모라는 그전에 번창했던 초기 청동기 시대의 성읍으로 추정된다. 사해 변에 위치한 밥 에드라는 기원전 2700년경 수천 명이 거주하던 성읍으로, 기원전 2000년경에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창세기의 소돔(?), 밥 에드라

1924년 미국 고고학자들은 사해의 리산 반도 동쪽 지역에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한 유적지를 발견하였다. 비록 일 년 중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광야 지역에 자리 잡고 있지만, 이 성읍의 북쪽에는 겨울철 우기에 내륙 고원 지대에서 내려오는 빗물이 넘쳐(와디 케락, Wadi Kerak) 사해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우물만 파면 얼마든지 물을 구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아랍어로 밥 에드라(Bab edh-Dhm)’로 불리는 이 고대 성읍은 1965년부터 3년간 지속된 발굴을 통해 기원전 3500년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2700년경에는 수천 명이 거주했던 초기 청동기 시대의 성읍으로 밝혀졌다. 만일 아브라함 시대를 중기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2000년 이후로 본다면 소돔과 고모라는 그전에 번창했던 초기 청동기 시대의 도시여야 하기에 밥 에드라는 소돔의 강력한 후보지로 떠올랐다. 이 도시는 기원전 2200년경에 그 명맥이 끊어졌다. 아마도 심한 가뭄과 기근으로 정착민들이 성읍을 떠나 철따라 이동하는 유목민이 된 것으로 보인다.

 

5천 년 전 사해 가장자리의 다섯 성읍

소돔과 고모라는 사해 골짜기에 위치한 다섯 성읍 중 대표 성읍이었다. 두 성읍은 시팀 골짜기에 위치해 있는데 소금 바다, 즉 사해 지역에 자리한 곳이다. 창세기 14장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네 임금이 시팀 골짜기로 원정 와서 그곳의 다섯 임금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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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를 비롯해서 아드마, 츠보임, 초아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1973년에 그 지역을 탐사하여 기원전 3000년경 설립된 초기 청동기 시대의 다섯 성읍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이미 발굴된 밥 에드라를 비롯하여 누메이라’, 가나지르’, ‘사피’, ‘페이파이다. 다섯 성읍은 모두 사해 가장자리에 걸쳐 남북으로 40km 내에 모여 있으며, 카나지르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와디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데이르 아인 아바타, 롯의 수도원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남편을 잃은 롯의 두 딸이 아버지를 통해 들을 얻고 그들이 각각 모암과 암몬 민족의 조상이 된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20세기의 고고학 탐사는 1983년에 최초로 발견되어 1992년에 발굴을 끝낸 데이르 아인 아바타’, 일명 롯의 수도원으로 마무리된다. 비잔틴 시대의 소규모 수도원은 5세기 밥 에드라 남쪽 20km 지점의 산비탈 중턱에 건설되었다. 6세기에 제작된 마다바의 모자이크 지도(1884년에 발견)에는 초아르 근처에 성 롯의(수도원)’이라는 그리스어 명칭이 등장한다. 이 유적지는 대영박물관이 1990년부터 3년에 걸쳐 발굴하여 실제로 롯의 이름이 새겨진 모자이크를 발견하였다. 그곳에는 롯이 두 딸과 동침했다는 굴을 중심으로 5세기경 바닥이 모자이크로 장식된 기념 교회가 건설되었으며, 8세기 이후 폐허 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슬람교의 꾸란(코란)에는 롯이 예언자로 등장하기 때문에 사해 주변 아랍인들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조상으로 숭배하였다. 따라서 아랍어로 사해는 까흐르 룻’,롯의 바다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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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르 아인 아바타, 성 롯의 수도원]

사해 동편 산비탈에 자리 잡은 .데이르 아인 아바타는 비잔틴 시대에 건설된 성 롯의 수도원이었다. 롯이 두 딸과 머물렀다는 동굴을 중심으로 바닥이 모자이크로 장식된 기념 교회가 건설되었다.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오랜 옛날에 사해변에 고도로 발달된 도시 문명이 존재했다고 전해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 성읍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들은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와 역청, 소금 기둥과 함께 성읍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왕정 시대로 들어와서 사해를 사이에 두고 요르단 건너편의 암몬, 모압 민족과 끊임없이 영토 분쟁을 일으켰던 이스라엘과 유다는, 어떤 형태로든 사해 문명이 저주 받은 원인을 신학으로 규명하고자 했을 것이다. 결국 창세기 저자들은 이 대립 구도를 축복 받은 아브라함과 저주받은 롯의 이미지로 대비시켰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모압과 암몬 민족은 바로 비윤리적인 근친상간으로 이루어진 롯의 후예라는 해설이 자연스럽게 첨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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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지 <성서와함께> 2009년 3월 396호 

http://www.with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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