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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소품들_반역이오(2 열왕 9,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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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18-12-18 01:35 조회1,4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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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소품들


반역이오 (2 열왕 9,23)

이우식 베드로

 

요즈음 독도 문제가 뜨겁다. 일본 교과서에 독도의 영유권 명기 소동을 비롯하여, 미국 의회 도서관이 독도 관련 주제어를 리앙쿠르 암으로 바꾸려 했던 일이 알려지면서, 파란이 끊이질 않는다. 이번 일로 그동안 미국의 지명 위원회(BGN)에서 독도를 주권 미지정 지역(Undesignated Sovereignty)’으로 표기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뒤늦지 않게 대처하여, 수정하기 전인 리앙쿠르 암으로 표기하되 영유권은 "한국(SOUTH KOREA)’ 또는 공해(OCEAN)’로 명시하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 이다.

 

리앙쿠르 암1849년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포경선 이름에 바위나 암초를 뜻하는 말을 덧붙여 만든 이름이다. 따라서 이 이름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 공군은 1948년에 독도 일대에서 폭격 연습을 하기도 하였다. 독도가 사람이 살 수 없는 암초나 바위가 아니라 유인도임을 드러내 주권 논란을 차단하기 위하여, 1980년부터 한 가족이 독도에 전입해 서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와 기록이 강조되는 오늘날에도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데도 국제 문제로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교과서 파동을 일으키고 외교 쟁점으로 비화하려 한다. ‘기록이 미치는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만 보더라도 여론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언론을 통폐합하여 정권에 불리한 보도는 아예 차단해 버리고 유리한 보도만을 싣지 않았는가.

 

아무리 옛날이라도 대제국을 다스리는 집권층의 행태가 오늘날과 크게 다를 리 없다. 1845년에 고대 아시리아의 님로드에서 높이 2m에 못 미치는 블랙 오벨리스크가 발굴되었다. 이 오벨리스크의 비문은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섯줄에 맞춰 조공을 바치는 각 국의 사절들을 묘사한 그림이 새겨져 있어 당대의 풍습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이 오벨리스크는 아시리아의 살만에세르 3(기원전 858-824년 재위)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석으로 밝혀졌다. 그림과 함께 제시된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하리의 이르 후네리의 왕궁 아쉬아타마쿠와 그 외 86 성읍을 정령하였다,

오므리의 아들 에후의 조공, 나는 그에게서 은과 금, 금대접과 밑이 뾰족한 금항아리, 금정과 금통, 주석과 왕홀, 나무 푸루투를 받았다.

III 무스리의 조공, 나는 그에게서 쌍혹낙타와 하마, 외뿔소와 산양, 코끼리와 원숭이를 받았다.

V 하티나의 카르파룬다의 조공, 나는 그에게서 은과 금, 주석과 청동, 구리 항아리와 상아, 그리고 흑단목을 받았다.

이 비문에서 눈에 띄는 이 름은 둘째 줄의 오므리의 아들 예후이다. 성경에서 예후는 엘리사 예언자가 보낸 제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아 임금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의 장군이다(2열왕 9,1-6참조). 이때 예후에게 맡겨진 사명은 아합의 가문을 쳐서 씨를 말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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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에세르 임금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예후, 블랙 오벨리스크(일부), 영국 박물관.]

 

"너는 너의 주군 아합의 집안을 쳐야 한다. 그래서 내가 이제벨의 손에 죽은 나의 종 예언자들뿐 아니라 주님의 모든 종의 피를 갚게 해야 한다. 그러면 아합의 온 집안이 망할 것이다”(2열왕 9,7-8).

이 신탁대로 예후는 동료 장군의 호응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이스라엘의 요람 임금과 유다의 아하즈야 임금을 죽였다. 그리고 바알 숭배자들을 모조리 처단함으로써 , “네가 내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니 참 잘하였다. 내가 마음에 품은 그대로 아합 집안의 일을 처리하였다”(2열왕 10,30)는 평을 받았다. 성경 기록만 보아서는 예후를 이스라엘에 야훼 신앙을 진작시킨 위대한 인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에서 블랙 오벨리스크는 당대의 객관적인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선, 예후를 수식하는 단어가 오므리의 아들이다. 오므리는 예후가 죽인 요람 임금의 태상왕이다. 그런데도 예후가 오므리의 아들로 불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대 국제무대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보다 오므리라는 이름이 잘 알려져 있었다는 반증이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건설하고 그곳을 요새 도시로 만들었다. 그의 아들 아합은 사마리아에서 이제벨을 아내로 맞아들 이는 혼인 정책을 취해 시돈인들과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한 다음, 사마리아에 쳐들어 온 아람 임금 벤 하닷을 사로잡아 전에 빼앗긴 성읍들을 돌려받는 개가를 올렸다(1 열왕 20,23-34 참조). 아합의 아들 요람은 같은 동족 국가인 유다와 관계를 개선하여 아람 임금 하자엘에 맞서 함께 싸움으로써 남북 왕국이 연대하여 외세에 적극 대처하는 정책 노선을 취했다.

 

그런데 예후의 쿠데타로 모든 것이 어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남북 관계가 틀어져 더 이상 유다의 협력을 얻어낼 수 없었던 그는, 이전의 오므리 왕조처럼 아람의 군세를 이겨낼 수 없어 영토를 야금야금 빼앗겨야만 했다(2열왕 10,32-33 참조). 그리고 더 나아가 나라를 보존하기 위하여 아시리아 임금 살만에세르에게 서둘러 조공을 갖다 바칠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로 정권은 잡았지만 외교와 남북 관계에서 망신과 불신을 가져온 그들의 모습이 지금도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출처: 월간지 <성서와함께> 2008년 9월 390호 

http://www.with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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