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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_창조와 진화에 관한 또 하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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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경의세계 작성일18-07-31 09:44 조회2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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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

창조와 진화에 관한 또 하나의 생각

 

김지형 안또니오(교수·고려대학교·환경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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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진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흔한 논쟁 가운데 하나가 창조와 진화의 문제이다. 너무 뻔한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기록된,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는 장엄한 선포와 계시에 따라, 천지의 창조주인 하느님을 믿는다고 세상을 향해 고백한다. 그러나 현대인은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생명체는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변화해 왔다고 배우고, 시험에서 그 사실을 옳은 답으로 골라 점수를 받으며 커 왔다. 재미있는 일이다. 한쪽에선 틀렸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 창조론을 가르치고 믿는 교회가 우습다며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또 반대쪽에선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나와 있는 창조를 버려두고 사람의 말인 진화를 믿는 것이 우습고 안타깝기 짝이 없다고 말한다. 서로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다. 창조와 진화신앙과 과학이 서로 불편한 관계를 풀지 못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분명해 보이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어느 편이든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내놓을 수는 있겠지만, 상대방이 완전히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다. 우리의 지식이란 필연적으로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을 담고 있으니 말이다. 둘째, 아무리 믿음이 강해도 생태계 조건 변화에 따라 오랜 시간에 걸친 생명체의 진화, 분화, 다양화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진화 과정을 분명히 보여 주는 화석 조각도 인간이 체험한 예수님의 영,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이 주는 감동과 계시가 된 진리를 바꿀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창조와 진화 이야기에 발을 담가 보는 것은 순전히 이 코너의 주제 때문이다.

 

지식과 이해 그리고 가치와 의미

사람이 배를 불리고 몸을 따뜻이 하는 일을 넘어서, 자신을 비롯하여 만물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수많은 생각이 이야기와 노래, 시로 형상화되어 대대로 전해져 왔다. 그 속에는 인간이 자연과 우주에 대해 가지고 있던 경험적 지식과 이해, 가치나 의미 체계들이 상상력과 함께 어우러졌다고 본다.

 

즉 존재에 대한 지식과 의미가 씨줄과 날줄로 쓰였고, 여기에 인간의 상상력이 곁들어져 아름다운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사실 그 이야기들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초월적 신에 의해서 계시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수준과 모습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니 끝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 담긴 자연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수준은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 담긴 존재 자체의 이유와 가치를 세대와 지역적 한계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이야기 속에 담긴 불완전한 지식 때문에 그 속에 담긴 완전한 의미와 가치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성경이 과학적 사실이 아닌 창조를 이야기하니 다른 모든 것도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참으로 난감하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봐야 한다.

 

생명제의 특성과 진화

생물학에서 가르치는 생명체의 특성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생명체의 기본 구성 단위는 세포이고, 이 세포들이 고도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 조직과 기관을 만들고, 나아가 온전한 생명체를 만든다. 둘째어떤 형태와 방법으로든 물질과 에너지를 이용하며 살아간다. 셋째, 크든 작든 생존 기간이 길든 짧든 외부 조건의 변화에 반응하며 적응한다. 넷째, 외부 환경이 변하더라도 생명체 내의 환경을 같게 유지하는 항상성을 가진다. 다섯째, 생명체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후세대를 만들고, 시작된 생명은 성장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특성 가운데 생명체가 성장한다는 사실은 진화와 관련하여 한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항목이다. 생명은 처음 시작된 그 순간에 이미 완전하지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완전한 개체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긴 성장 과정을 지난 후이다. 그뿐 아니라 육체적 성장이 끝났다 할지라도 또 다른 존재의 차원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나며 성숙해 간다. 이는 인간의 일생을 살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잉태되는 순간에 사람이 되지만, 그가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은 평생 계속된다. 이와 같이 하나의 생명체로 존재하기 시작하여 성장, 성숙하는 과정을 거쳐 온전해지는 게 생명체의 특성이라면, 창조와 진화가 꼭 분리되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 않을까?

 

진화는 창조의 일부분이며 창조는 진화를 포함하는 것으로 별 충돌 없이 어우러지지 않을까? 하느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듣고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지금 여기에 와 있고, 그날에 완성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비슷하게 생각해 보면 창조 또한 한처음의 그날에 시작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날에 완성될지도 모른다.

 

진화론 또는 과학 때문에

별 뾰족한 결론도 없이 창조와 진화의 이야기가 문제가 되는 진짜 이유는, 진화론 또는 이와 비슷한 과학적 사실이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위협하거나 약화시키며,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품 안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염려는 역설적이지만 매우 비과학적이다. 교회는 천동설과 지동설이 대립할 때 천동설을 포기하고도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증언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과학적 지식과 벌이는 논쟁에서 이김으로써 신앙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굳이 과학과 연관시켜 따지자면, 과학적 지식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 문제였다고 봐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과학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우면 되지, 과학과 가까울 필요는 없다. 예수님처럼 되어야지 갈릴래오나 아인슈타인처럼 될 필요는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세상의 이치에 맞춰 사랑을 고백할 필요가 없듯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 과학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랑 고백은 가슴이 떨리게 해야 제맛이 아닌가? 하느님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 과학자가 되거나 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과학에 주눅 들지 말고 마음껏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면 된다.

 

혹시 누가 왜 사랑하느냐고 묻거든 그냥 그분의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는 만큼만 정직하게 이야기하자.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다. 신앙의 가장 큰 위협은 과학이나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교만, 어리석음, 완고함, 고집, 게으름 따위나 집착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과학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교회는 이렇게 가르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창조되었고, 자기 창조주를 알고 사랑할 수 있으며, 창조주로부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세워져 만물을 다스리고 이용하며 하느님을 찬양한다”(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 헌장112). 

 

출처: 월간지<성서와함께> 2007년 8월 377호.

 www.with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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