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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_하늘이 움직이든,땅이 움직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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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경의세계 작성일18-07-31 09:51 조회2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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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

하늘이 움직이든땅이 움직이든


김지형 안또니오(교수·고려대학교·환경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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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 교회와 과학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천동설과 지동설 이야기, 더 정확하게는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와 교회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지금이야 지동설이 어린이에게도 상식이 되었지만, 갈릴레오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역사는 역사가와 역사가가 마주한 사실 사이에 계속되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끝나지 않는 대화라는 글귀가 내 머리에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즉 갈릴레오와 교회 사이에 있었던 예전의 일이 오늘날 나의 현실의 대화 속에서 여전히 의미가 있다.

 

하여튼 갈릴레오와 교회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중고등학교 때 배운 몇 가지 사실을 다시 기억해 보자. 갈릴레오 주변에서는 사고와 관념에서 벗어나 관측을 바탕으로 한 과학이라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지구과학 수업 시간에 천체의 운동을 배울 때 이름을 기억하는 케플러, 코페르니쿠스 같은 이들이 존재하던 때다. 갈릴레오의 생애는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요, 건축가요, 화가요, 시인이었던 미켈란젤로(1475-1564)가 죽던 해에 시작되었고, 근대 과학의 길을 닦은 뉴턴(1643-1727)이 영국에서 태어나기 바로 전에 안질로 말미암아 거의 장님이 된 해에 끝났다. 갈릴레오는 이순신 장군(1M5-1598) 보다 20년가량 늦게 태어나서 40년 정도 더 살다 간 사람이고, 나보다는 400년 정도 앞선 사람이다. 또 흔히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루터의 95개조 명제 발표 사건이 갈릴레오가 태어나기 약 50년 전인 1517년에 있었으니, 교회는 몰아치는 종교 개혁의 바람 속에 있을 때였다. 즉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 자주 거론되는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의 우주론에 대한 교회의 이단 판결과 그에 따른 화형 사건을 갈릴레오와 교회는 다 같이 보고 겪었다는 사실도 기억해 둘 만하다.

 

지동설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런데도 갈릴레오가 지동설과 관련하여 교회의 재판을 받은 이유는, 지동설을 담은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그가 죽은 이후에 나왔고, 그 후에 갈릴레오가 출판한 책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사실상 지지하며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갈릴레오와 교회 사이에서 벌어진 일, 그가 교회 재판정에서 걸어 나오며 중얼거렸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 따위를 다룬 책들은 따로 있다. 그러니 여기에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할 필요 는 없을 터, 그저 한두 가지 사실이나 돌아보자.

 

먼저 교회가 천체의 운동에 관한 이론과 책을 교회의 영역 안에 있는 일로 인식했고, 교회가 믿는 바와 대립하여 이단이라고 판단했다는 사실 자체를 돌아볼 만하다. 오늘날 어느 과학자나 공학자가 발표한 논문을 놓고 그 결과가 일으킬 수 있는 윤리적 측면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사실 자체의 진실성에 대해 종교 기관이나 종교 지도자가 왈가왈부하는 일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과연 하느님께서 계시한 진리,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에 대한 교회의 단순한 무지가 원인이었을까? 혹시 다른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교회가 갈릴레오와 더불어 논쟁이나 토론을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책을 검열하고 금서 목록에 올렸으며, 그를 재판정에 불러내어 유죄 판결을 내렸고, 감옥에 가두거나 가택 연금시켰다는 사실 앞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교회라는 기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유나 동기에 상관없이 교회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세속적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그때는 교회가 그렇게 힘이 있었는데 지금 힘이 없다면, 어느 상태가 더 바람직한가?

 

사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의 표면적인 원인과 속에 감추어진 진실이 다른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지동설과 천동설의 이야기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겉으로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의 다른 천체들이 도느냐, 또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도느냐는 사실 자체에 대한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유가 맞물려 있었던 듯하다. 하느님께서 계시한 진리를 넘어 교회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맺은 정치, 사회, 문화적인 틀에서 이 문제를 보는 것도 괜찮다. 즉 지동설과 갈릴레오에 대해 교회가 가졌던 태도와 단죄는 교회가 과학에 대해 단순히 무지했기 때문이거나 계시된 진리를 따르는 길 위에서 생긴 문제라기보다, 어쩌면 교회가 세상과 맺은 관계 속에서 생긴 욕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교회가 세상의 중심에 서서 사람의 모든 활동에 자신의 질서를 부과하고, 그럴 수 있는 세속적 힘을 계속 가지고 싶어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과 얼마 전에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우석 사태가 그렇게 복잡하게 꼬였던 것도 과학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문제가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권력을 바탕으로 한 완고함이었던 것이지, 결코 과학적 사실에 대한 무지가 아니었다.

 

사실 과학적 사실, 자연에 대한 지식에 대해 무지나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며, 앞으로도 온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의 일상 경험을 바탕으로 삼는다면, 지동설보다 천동설을 따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해는 물론이고 달이 뜨고 지며, 별자리가 움직이는 것을 땅 위에서 날마다 바라보는 인간이 어찌 하늘 대신에 지구가 움직인다고 말할 것인가? 사실 지금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적 경험과 상관없이, 교과서와 교사에게 배워서 태양이 아닌 지구가 돈다고 대답하는 것은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직하게 말하는 대신에 학교에서 교사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말하는 이가 있다면그들을 어찌 천동설을 믿는 이보다 덜 어리석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눈에 보인다고 다 믿을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다 부정할 것도 아니다. 참으로 진리를 논할 때는 겸손이 최고인 듯하다. 즉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으려는 욕망, 세상을 모두 자신의 앞마당에 놓고 질서를 잡으려는 욕망, 힘에 대한 욕망을 버릴 수만 있다면, 잘못을 많이 줄일 수 있고 무지가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 지도자의 역할을 해내는 것이 늘 같지 않다.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 중심적인 일을 하는 것도 늘 같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용상이 아니라 십자가에 오르셨고, 그곳에서 진리를 선포하셨다. 하느님을 세상에 선포하려고 스스로 용상을 차지하거나 세상의 용상에 예수님을 끌어 앉히려는 시도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갈릴레오와 교회 사이에 있었던 갈등, 지동설과 천동설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지구가 움직이냐, 하늘이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사람이 어디로 움직이냐이다. 우리가 몸을 움직여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복잡하게 논쟁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22). 땅이 움직이든, 하늘이 움직이든, 둘 다 움직이든, 진정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움직임은 성령의 움직임이며, 그분 섭리의 움직임이다.

 

 

 

 

출처: 월간지 <성서와함께> 2007년 9월 378호.

 www.with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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