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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보는 성경 이야기_장애인은 살아 있는 순교자​(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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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18-09-07 14:37 조회2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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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보는 성경 이야기


장애인은 살아 있는 순교자

서정욱 미카엘(교수 · 서울대의대 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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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103위 성인께서 지켜주시는 복받은 나라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성지들과 피정의 집에 가면 그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름 없는 순교자 묘지에서도 그분들의 열정과 믿음을 묵상하게 되고, 관광객으로 붐비는 유럽의 성지 못지않게 주님의 사랑,평화와 행복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좀 비판적으로 본다면 다른 할 말도 많다. 그분들은 같은 날 순교하신 것도 아니고 같은 날 태어난 것은 더욱 아닌데 밀린 숙제 하듯이 한꺼번에 성인품에 오르셨다. 신자들도 103위 성인 중에서 몇 분을 기억한다는 말인가? 우리나라의 가톨릭 인구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그분들을 온전히 모시고 있다고 하기에는 부끄럽기만 하다.

 

과학자 또는 의사로서, 순교의 과정과 순간을 생각하면 한마디로 끔찍하고 두렵기만 하다. 평화로운 신앙생활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암살을 당한다면 모를까, 만약 우리 가족이 그런 순교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면 너무 처참하여 생각조차 하기 싫다.

 

성인들이 살아 계실 때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이번의 죽음을 참아내기만 하면 언젠가는 성인으로 추대되고 후손들이 자랑스러워할거야.” “200년 이내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시대가 오고, 나의 죽음이 ‘순교’라고 표현될 때가 올 거야.” 대답은 모두 “아니다”라고 감히 추측한다. 아니, 당신이 당하는 고통과 다가오는 죽음이 바로 ‘순교’라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분들은 고통과 죽음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조차 생각할 수 없는 약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고통을 감내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유 “이 모든 것이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는 마음을 가졌으리라는 엉성한 추측을 해 본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에 종교의 자유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분들의 순교가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저 역사 속의 슬픈 과거로 묻어 버릴 일은 아닐까? 내 주변에 그런 순교의 현장이 있을까?

 

병원에서 근무하다 보면 온갖 사연을 접하게 된다. 남이 갖고 있지 않은 희귀한 병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남이 가지고 태어나는 보통 지능을 갖지 못한 사람, 동물도 할 수 있는 기본 능력인 보고 듣고 말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못한 시각 장애인과 청각 장애인, 죽을 날을 받아 놓고 고통 속에서 그날을 기다리는 암 환자, 암처럼 죽는 병이라면 차라리 낫겠다고 하소연하며 하루하루를 지루하게 보내는 많은 장애인, 자식이 있어도 그들을 멀리 두고 짝사랑에 만족해야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등. 사실은 이런 분들이 병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단지 우리가 눈길을 주지 않고 있어서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뿐이다.

 

성경에는 눈이 멀게 된 토빗(토빗 2,10 참조), 불구자, 나병 환자, 간질 환자 등 많은 장애인 이야기가 나온다.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지만 그들이 받은 고통과 신앙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2000년 전의 장애인과 우리 주변에 지금 살아 계신 장애인들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놀란다. 현대 문명의 훌륭한 의술로 질병이 뿌리 뽑혀진 것도 아니고 복지 정책이 누구에게나 혜택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가깝고 곁에 있어야 할 가족의 사랑조차 장애인들에게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점이 안타깝다.

 

장애인은 자신의 고통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겨낸다. 지하철역 계단이나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구걸을 하기도 하고, 장애인의 권리를 찾겠다고 거리로 나서기도 한다. 운이 좋은 사람은 장애인 복지 시설에서 장애인들만의 특별한 인생을 살기도 한다.

 

그렇지만 겉으로 드러난 이러한 장애인의 모습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장애인은 겉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능력조차 없다. 그들은 하루하루 가장 단순한 운동을 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지키고 있다. 저항하기보다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묵상하며 하루하루의 생명에 감사하고 있다. 숨 쉬는 것도 어렵고, 기도하는 것조차 힘든 사람들. 때로는 의식도 없이 사경을 헤매는 사람들도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에 그냥 만족하는 분들이다.

 

우리 어머니는 4년 전 청각 장애 6급을 받으셨다. 보청기 값을 일부 돌려받았다. 그러다가 지난 1월 설날 뇌졸중을 선고 받았다. 마침 곁에 있던 며느리의 도움으로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 다행히 네발 지팡이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는 행운을 받았다. 어머니는 “더 이상은 낫지 않을까?” 하면서 마비된 팔다리 불편함을 하소연하시고, 더 좋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욕구를 표현하신다. 뇌신경장애 2급을 받으셨다. 이제는 어머니와 비행기를 타면 각각 50% 할인되니 나 혼자 제주도 갈 일이 있을 때 어머니를 덤으로 모시고 갈 수 있다. 매월 7만 원이 나오고 연말정산에서도 세금 공제가 된다. 장애인을 모시고 다니는 차량이라는 표식을 붙이고 다니면 남들이 주차 못하는 곳에도 차를 댈 수 있다. 그런 혜택에 대해 알아보고 필요한 절차를 이행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묵상을 좀 더 냉정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장애는 우리 가족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흔히들 그러는 것처럼, 이 고통이 누구 때문인가를 탓하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신앙생활하고, 성당에서 봉사도 조금하셨는데 어머님께서 왜 장애인의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원망도 하였다. 성모님같이 아름다우신 우리 어머니께 왜 이런 일이 오는지 의심하였다. 다행히 질병이 온 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극복할 지혜를 가진 것에 감사하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살아 계신 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셔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를 이렇게 키우시고 끝없는 사랑을 주신 소중한 분이시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장애인은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고통스럽다. 종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처럼 매질과 조롱을 당하는 고통은 아니지만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도 고통을 받는다. 때로는 왜 이런 고통이 자신에게 있냐고 주님을 원망할 유혹도 받는다. 어떤 장애인은 고통을 참기 어려워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이 바라본 어머니와 우리 주변의 많은 장애인은 항상 평화로우시고, 오히려 우리를 걱정해 주는 말씀과 미소로 우리에게 기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신다.

 

순교자들이 오랜 세월 고통을 받으셨듯이 우리 어머니의 장애도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다. 우리보다 더 큰 고통 중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행복을 증거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순교자의 평화를 느낀다. 그리고 언젠가는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으로 주님 품으로 가실 것이라고 믿는다.

 

 

나에게도 또 누구에게든지. 언젠가는 그런 고통과 평화의 ‘순교’가 올 것임을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이자. 그것이 순교자 성인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다.

          

 

출처: 월간지 <성서와함께> 2006년 9월 366호 

www.with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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