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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보는 성경 이야기_희망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묵주기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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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18-09-07 15:18 조회2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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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보는 성경 이야기


희망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묵주기도

서정욱 미카엘(교수 · 서울대의대 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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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정신과에서는 마음의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위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그럴 리 없어”, “그러면 안 돼”, “그럴 줄 알았어”, “오히려 잘 된거야”, “난 모르는 일이야” 등 불안감을 감추고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 이해, 거부, 부정, 반박, 포기, 망각 등과 같은 노력을 한다. 때로는 역발상으로 경건한 의식(ritual)처럼 과대 포장을 하거나, 아름다운 모양으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도 바로 그런 논리에서 비롯된다.

 

의사들도 나약한 인간이어서 질병이 두렵고, 공부가 어려우며, 치료하기 어려운 환자를 마주하게 되면 피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의학에서 쓰는 여러 가지 표현에서도 이런 마음이 드러난다. 흉악한 자궁암을 꽃양배추(cauliflower) 모양이라고 하고, 카페오레 점, 딸기점, 젖꼭지 암종, 빵과 버터 모양 심낭염 등으로 표현한다. 그 외에 묵주(로사리오) 모양도 여러 번 등장하는데, 결핵성 림프절염으로 목에서 덩어리가 구슬처럼 만져지는 것을 로사리오라 하고, 구루병(비타민 D 결핍증)에서 갈비뼈 앞쪽이 나란히 돌출하는 것을 그렇게 나타내기도 한다.

 

10월이 묵주기도 성월로 설정된 것은 1883년 9월 1일에 발표한 교황 레오 13세(1878-1903)의 회칙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이보다 300여 년 앞선 16세기에 교황 비오 5세(1566-1572)는 로사리오 축일을 제정하였다.

 

16세기 당시 로마 교회가 분열된 틈을 타서 터키의 이슬람 교도들이 로마를 정복하기 위하여 침공해 왔다. 그때 교황 비오 5세는 모든 그리스도국의 제왕과 함께 공동 방어를 다짐하고 연합군을 편성하였다. 성모 마리아에게 묵주기도를 바치며 전쟁터에 나간 그리스도교 연합군은(1571년10월7일) 코린토 만의 레 판토(Lepanto)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10월 7일을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19세기 교황 레오 13세 당시에는 유럽 전역에 퍼진 각종 사상적 오류와 이단, 그리고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종교 등에서의 무질서로 교회가 커다란 위기에 처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교회를 구하기 위해서 교황 레오 13세는 묵주기도 성월을 선포하였다. 16세기 이슬람 교도들의 침공 때 성모의 보호하심으로 승리한 사실을 재인식시키면서, 19세기의 위기도 묵주기도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성모님께 의탁하며 전 세계 그리스도교 국가와 하느님 교회의 백성에게 진리와 사랑의 구원 신비를 담은 로사리오라는 무기를 손에 잡고, 이 험난한 시대에 평화와 구원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요청하였다.

 

장미꽃을 한 송이 한 송이 바친다는 의미의 로사리오가 주렁주렁 달린 염주 모양으로 변형되어 사용되며, 이들이 전쟁이나 사상적 갈등을 헤쳐 나가는 영적 무기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좀 아이러니하게 들린다. 백년 전쟁 당시 프랑스의 대포에는 장미꽃이 새겨져 있었는데, 전쟁 중에 철제 주물로 대포를 만들면서 장미꽃을 새겨 넣는 여유가 신기하고 오묘한 인간 심리를 보여 준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정한 건강한 사람은 육신과 정신에 병이 없을 뿐 아니라 또 한 가지, 즉 영적인 건강을 갖춰야 한다. 소심하고 무기력하며 추진력이 없고, 끈기와 결단력이 없는 것은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이다. 뜨거운 열정과 정의감, 자신감, 단결심, 충성심 그리고 인내와 추진력이 있어야 영적으로 건강한 것이다.

 

16세기 이슬람 교도의 침공에 대항한 성모님 군대와 지금의 전쟁은 어떻게 다를까? 지금 중동 전쟁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한다면 이길 수 있을까? 지금 교황님은 전쟁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 당시는 왜 교황님 이 전쟁에 앞장섰을까? 알쏭달쏭하여 네이버, 구글 지식 검색을 찾을 만하다(검색 창에 <묵주기도 전쟁>을 쳐보세요).

 

16세기 민주주의와 가치관은 지금과 달랐다. 노예를 사고 파는 등 사람 목숨의 존엄성도 지금과 달랐다. 굶어죽거나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은 시절이어서, 질병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오염된 지역의 사람과 모든 생명체를 몰살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사람의 평균 수명이 30세라는 것을 생각하면 전쟁조차 정치의 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요즘 선거에서 이기면 정권을 잡는 것처럼, 당시에는 전쟁에서 이겨서 살아남아야 왕이 되는 시절이었다. 그들이 전쟁에 나가고 사람을 죽이고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스트레스였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군사들에게 열정과 자신감을 심어주고,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에서 벗어나 재활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서는 슬기로우신 어머니, 지혜로우신 동정녀, 든든한 힘, 신비로운 장미, 다윗의 망대, 순교자의 모후, 증거자의 모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모후이신 성모님께 묵주기도를 바쳤을 것이다.

 

16세기의 전쟁에 해당하는 스트레스가 요즘은 어떤 것일까? 정치인은 선거에 임하는 상황일 것이고 의사는 환자를 만나고 수술을 하려는 상황. 환자는 수술을 받으려는 상황. 학생들은 시험을 앞둔 모습 등이 모두 전쟁을 앞둔 절박한 상황이다. 과학자는 어려운 실험을 여러 차례 실패하고 마지막 가능성을 기다리는 심정. 취직을 위해서 면접을 받는 청년의 모습. 연주회나 공연을 앞둔 음악인과 연극배우. 물론 전쟁에 나간 군인도 포함되고, 몽둥이를 들고 덤비는 시위대에 맞서는 전투 경찰, 소방관도 마찬가지이다. 현대는 매일같이 16세기에 겪던 전쟁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숙제, 두렵고 위험한 임무, 피할 수 없는 시험, 다가오는 죽음의 그날,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우리가 힘든 일을 당하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며 때로는 자살을 하는 무모한 경우를 본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16세기나 19세기보다 더 많은 묵주기도를 바쳐야 할 때인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영적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힘들어하는 동료와 가족을 위해서 영적인 건강을 선물하는 것은 가장 지혜로운 일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의 손을 잡고, 성모님의 도우심에 기대어, 희망과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출처: 월간지 <성서와함께> 2006년 10월 367호 

http://www.with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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