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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동 언어와 성경_눈으로 보는 하느님(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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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18-09-12 15:25 조회3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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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동 언어와 성경

눈으로 보는 하느님

배철현(교수 ∙ 서울대학교 ∙ 종교학과)

 

인간은 신들과 달리 정해진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고대 수메르인들은 인간을 ‘남타르(Namtar)’ 즉 ‘정해진 것, ‘운명’이라고 불렀다. 구약성경에서는 히브리어로 인간을 ‘아담’이라 하는데, 그 말은 ‘붉은색을 띤 흙, 또는 땅’이란 의미의 ‘아다마’와 어원이 같다. 결국 인간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허무함을 표현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인 <길가메쉬 서사시>는 인간의 한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길가메쉬 서사시>의 관심은 고대의 다른 신화와 같이 신들과 우주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이다.

 

길가메쉬는 역사상 인물로 기원전 2600년경 우룩(Uruk, 성경의 에렉)의 통치자였다. 그는 엄청난 힘과 에너지를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또 우룩의 지도자로서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뛰어든다. 언제나 군대를 대기시키고 친구들을 불러내며, 실신할 정도로 도시의 젊은이들을 괴롭혀 지쳐 쓰러지게 만든다. 이에 우룩 시민들은 신들에게 불평하여 어떤 조치를 취해 달라고 청한다. 신들은 그가 지닌 월등한 에너지와 힘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여겨, 그와 비슷하게 비범한 잠재력과 포부를 지닌 친구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신들은 창조자 아루루(Arnru) 여신에게 길가메쉬의 짝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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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극복하는 영웅 길가메쉬 인장. 기원전 20세기.]

 

아루루는 천상의 신을 모델로 하여 하나의 정신적 이미지를 만든다. 그녀는 손을 씻고 진흙을 떼어 낸 다음, 그것을 사막에 던져 엔키두(Enkidu)를 창조한다. 길가메쉬와 엔키두는 만나자마자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고 마침내 신들에게 도전한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외딴 삼나무 숲속에 있는 무시무시한 후와와를 죽였고, 거만한 태도로 위대한 여신을 경멸했으며, 천상의 황소를 죽임으로써 여신보다 그들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들이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후와와는 엔릴(Enlil)에 의해 삼나무 숲의 감시인으로 임명된 자였기에, 길가메쉬와 엔키두가 그를 죽인 것은 엔릴을 화나게 했고,엔키두는 죽어야 하는 판결을 받았다.

 

죽음은 사물의 계획 가운데 일부이기에 인간도 죽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 시대의 가치는 전투에서 적과 싸우다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여 이름을 남기는 것이었다. 죽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길가메쉬를 사로잡았다. 그는 다른 것을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밤낮으로 그를 괴롭혔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조상인 우트나피쉬 팀(Utnapishtim)이 영생을 얻어 세상 끝날까지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가 불멸의 비밀을 알아내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우트나피쉬팀을 찾으려고 지하 세계를 여행하던 중에 그는 어느 해안에 도착해 주막에 들어간다. 주모는 그의 지저분한 외모와 가죽옷을 보고 겁에 질려 황급히 문을 걸어 잠그려 했다. 그러자 길가메쉬는 그녀 에게 엔키두의 죽음과 영생을 추구하는 자신의 여행, 그리고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가 불멸의 비밀을 알아내려 한다고 말한다. 이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길가메쉬여,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나요? 당신이 찾고 있는 생명을 결코 찾지 못할 거예요.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그들은 죽음을 인간의 몫으로 나누어 주었고, 그들이 생명을 채어 가 버렸기 때문이죠. 길가메쉬여, 당신의 배를 가득 채우세요. 밤낮으로 즐거운 일을 만들고 매일 향연을 베푸세요. 밤이나 낮이나 춤과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세요. 깨끗한 옷을 입고, 머리와 몸을 씻으세요. 손안에 품고 있는 당신의 아이를 보시고 당신의 아내가 당신 품 안에서 기뻐하게 하세요. 인간은 이러한 일들에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충고는 코헬 9,7-9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니 너는 기뻐하며 빵을 먹고 기분 좋게 술을 마셔라. 하느님께서는 이미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신다. 네 옷은 항상 깨끗하고 네 머리에는 향유가 모자라지 않게 하여라. 태양 아래에서 너의 허무한 모든 날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네 허무한 인생의 모든 날에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인생을 즐겨라. 이것이 네 인생과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너의 노고에 대한 몫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와 코헬렛 모두 당시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던 격언을 인용한 것 같다.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길가메쉬는 아직 영생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노아와 같이 홍수에서 살아남은 우트나피쉬팀과 대면한다. 우트나피쉬팀을 바라본 순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우트나피쉬팀 당신을 바라보니 당신의 몫도 다르지 않군요. 당신도 나와 똑같군요! 당신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도 나와 똑같습니다! 내 마음은 당신과 싸움을 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처럼 한가하게 누워 있군요. 말해 주십시오, 당신은 어떻게 신들의 회의에 참석해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까?”

길가메쉬는 우트나피쉬팀이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이 상정해 놓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어떤 생각의 전환이란 사실을 감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개안開眼은 삶의 의미를 추적하려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트나피쉬팀은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길가메쉬가 떠나려 하자, 그는 깊은 땅 밑의 달콤한 물 압수(Apsu) 안에 가시가 많은 풀이 자란다고 이야기해 준다. 이 풀에는 생명체를 다시 젊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풀의 이름은 ‘노인이 어린이가 되듯이’였다. 길가메쉬는 너무나 기뻐 물속에 들어가 풀을 뜯었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연못을 보고 목욕하러 옷을 벗고 들어갔다. 이때 뱀이 길가메쉬가 벗어 놓은 옷에서 풀향기를 맡고 그 풀을 낚아채 먹어버렸다. 뱀은 굴 안으로 들어가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롭게 빛나는 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길가메쉬의 여행은 끝이 났다. 결국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회춘의 힘을 얻은 것은 길가메쉬가 아니라 뱀이었다. 결국 그는 완전하게 패배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길가메쉬는 주저앉아 울었다. 눈물이 계속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렇게 패배를 인정한 이 장면의 분위기는 이전과는 다르게 뭔가 새롭다. 여기에는 공포와 절망 대신에 평정과 체념, 심지어 유머와 자조적 포기가 엿보인다.

 

영국의 17세기 시인 J. 드라이든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났고, 누구도 진정한 행복을 자랑할 수 없으니 일어나는 일들을 침착하게 견뎌 내자. 지나치게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말자. 우리의 볼일을 벗어나는 일에 대해서. 순례자와 같이 우리는 정해진 곳을 향해 간다. 세상은 여인숙이며 죽음은 여행의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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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리히 쿨하넥, 욥Ⅰ, 2002, 64×92cm, 석판화]

 

이처럼 값지게 얻어낸 체념, 현실에 대한 인정은 서사시가 처음 시작한 곳, 곧 길가메쉬의 영원한 업적이 우뚝 서 있는 우룩의 성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 존재이지만, 그가 행한 일은 계속 살아남는다. 불멸의 척도는 이 업적 속에 있다. 이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불멸의 길이다. 이 시각을 욥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는 바르고 정직한 사람이었는데 무고하게 재앙을 당하자 신에게 절규한다. 그러나 욥은 하느님의 다음과 같은 물음에 할 말을 잊는다: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네가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그 치수를 정하였느냐? 너는 알지 않느냐? 또 누가 그 위에 줄을 쳤느냐? 그 주춧돌은 어디에 박혔느냐? 또 누가 그 모퉁잇돌을 놓았느냐? 아침 별들이 함께 함성을 지르고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두 환호할 때에 말이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그것이 모태에서 솟구쳐 나올 때, 내가 구름을 그 옷으로, 먹구름을 그 포대기로 삼을 때,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말이다”(욥 38,2-11).

욥은 비록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으나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온 우주를 주관하는 분이시니 욥에게 신의 섭리를 경외하며 관조하라고 요구하셨을 뿐이다. 욥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2-6).

이는 세상과 하느님을 보는 시각이 변화했음을 뜻한다. ‘나’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세상과 하느님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우리 삶 속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일상에서 보라는 것이다. 마침내 길가메쉬와 욥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게 된 것이다. 나도 그들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을 일상에서 발견했으면 좋겠다. 

 

 

출처: 월간지 <성서와함께> 2007년 6월 375호 

http://www.with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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