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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동 언어와 성경_말의 다양성과 성령(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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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18-09-12 15:27 조회1,1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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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동 언어와 성경


말의 다양성과 성령

배철현(교수 ∙ 서울대학교 ∙ 종교학과)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말로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하며, 문자로 생각을 기록하여 남기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을 표시했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말’에 대한 기원을 설명하려 했다. 특히 창세 10장에서는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 하느님께서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고, 노아와 그 자손들을 통해 언어가 온 땅 위에 퍼졌다고 기록한다. 성경 저자는 노아의 족보를 통해 인종, 언어, 지역의 다양성을 강조하였다. 인종은 노아의 세 아들, 곧 셈, 함, 야펫에게서 생긴 자연스러운 결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저자는 인류의 특징인 언어 다양성의 기원에 대해서는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한마디로 성경 저자는 수많은 언어 때문에 당황한 듯하다. 성경에서 주장하듯이 온 인류가 한 가족에서 생겨났다고 가정한다면 왜 수많은 언어가 존재하는가? 과연 수많은 언어가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인가? 성경 저자는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창세 11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1절 필자 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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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르 브뤼헐, 바벨탑, 1563.]

 

언어의 혼동대한 메소포타미아 기록

그렇다면 창세 11장의 기록처럼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사용한 적이 있는가? 성경보다 앞선 기록에 언어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언어의 혼동’ 또는 ‘언어의 다양성’에 대한 기록이 기원전 2천 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도시 우르에서 쓰인 <엔메르카르와 아라타의 주인>이라는 서사시에서 발견된다.

 

이 서사시는 우룩(Uruk; 성경의 에렉)의 대사제이며 임금이었던 엔메르카르(Enmerkar)가 동쪽 어디에선가 살고 있었던 아라타(Arratta)라는 나라의 임금과 벌인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언어의 혼동에 관한 기사가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엔메르카르와 아라타의 주인>

(135) 모든 방에서 거룩한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워라.

(136) 누딤무드 신(엔키 신)의 주문을 그에게(아라타의 주인) 낭독하여라.

(137) 그때에는, 뱀도 없었고 전갈도 없었다.

(138) 하이에나도 없었고 사자도 없었다.

(139) 개나 늑대도 없었고 눈물이나 머리카락을 세지도 않았다(화낼 일도 없었다는 의미).

(140) 인간은 적이 없었다.

(141) 그때에는 수바르트(메소포타미아 북쪽), 하마지(알려지지 않은 지명),

(142)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수메르가 왕권을 행사하는 위대한 나라였다.

(143) 우리(아카드 나라)는 중용이 지배하는 나라였고

(144) 마르투(아모리 나라)에는 안전한 초장이 있고

(145) 하늘과 땅의 모든 지역에서 사람들이 그를(아라타의 주인) 의지했다.

(146) 그리고 사람들은 엔릴에게 정말로 한 언어로 말했다.

인간은 처음에 한 언어를 사용하였지만, 나중에 지혜의 신인 엔키(Enki)가 언어를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기술한다. 엔키는 인간을 보호하는 신으로 인간에게 다가올 위험을 미리 알려 주고 인간의 멸종을 막는 신이다. 엔릴의 귀에는 한 언어를 쓰는 인간이 시끄러워 인간을 없앨 계획을 세운다. 엔키는 찌우수드라에게 엔릴의 ‘홍수’ 계획에 관해 미리 알려 주고 인간의 말을 다양하게 하여 소음을 줄이려 한다.

 

인간이 한 언어를 사용하여 소음을 내기 때문에 신들이 쉴 수가 없어 홍수로 인간을 파괴한다는 내용은 아카드어로 쓰인 <아트라 하시스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들이 인간처럼 노역을 했던 까마득한 옛날에, 신들은 최고의 신인 엔릴에게 인간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자신들을 대신하여 노역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지혜의 신인 에아의 기지와 출산의 여신인 마미가 진흙으로 인간을 만든다. <아트라 하시스 신화>는 어떻게 인간의 소음이 신들을 괴롭혔는지 기술하고 있다.

 

<아트라 하시스> 신화 제2토판

(1) 600년이 지났다.

(2) 그리고 인간의 나라는 넓어졌고 사람들은 증가하였다.

(3) 나라는 우는 황소처럼 시끄럽게 되었다.

(4) 그 신(엔릴)은 인간들이 떠드는 통에 쉴 수가 없었다.

(5) 엔릴이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엔릴은 신들을 불러 모아 인간의 소음을 막기 위해 홍수를 준비시킨다. 여기에서도 지혜의 신인 에아가 아트라 하시스에게 홍수가 임박했음을 알려 방주를 짓도록 명령한다. 대표적인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서도 태초에 인간이 한 언어를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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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라 하시스 토판 문서>, 바빌로니아 홍수 이야기를 쐐기 문자로 새긴 토판.]

 

성경이 말하는 ‘언어의 다양성’

그러면 성경에서는 언어의 다양성에 관한 기원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창세 11,1-9에는 인간이 신아르 평야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자 하느님께서 개입하여 도시 건축을 중단시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전통적으로 ‘바벨탑 이야기’라고 알려진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고, 인간이 신아르라는 도시에 이주하면서 시작된다(1-2절). 인간은 도시를 건축하기 위하여 벽돌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도시의 건설은 그곳 거주자들이 명성을 날리고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다(3-4절).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이와 같은 자만심을 보시고 그들의 언어를 다양하게 하신 후 지상의 넓은 땅으로 흩으신다. 사람들이 한곳에 살면서 한 언어를 사용한다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다 이루려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6-7절). 하느님께서는 ‘바벨’, 즉 인간의 언어를 ‘혼돈’시키시어 인간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고 하는 자만심을 좌절시키셨다(8-9절).

 

성경 저자는 이미 구전되어 오던 ‘언어의 혼동’에 관한 이야기를 기초로 창세기를 각색한 것이 분명하다. 특히 사람들이 흩어진 이야기, 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탑 이야기, 그리고 언어의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이 한 언어가 아니라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것,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섭리 가운데 하나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다름’이 바로 성령의 활동이라고 기술한다. 오순절 다락방 사건이 기록된 사도 2,3은 사람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다른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각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는데, 외국어라고는 전혀 모르는 예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더니 갑자기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말로 기도를 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사도 2,6은 창세 11장의 내용과 일치한다. 기원전 2세기경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언어를(glossan) 혼동시켜 (synecheomen) 서로가 다른 말(phonen) 을 하였다.“

이 내용과 유사한 사도 2,6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phonen)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idia dialecto)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synechythe).”

언어와 민족이 다양해지고, 그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하느님 창조 세계의 섭리이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존중되는 세계, 이 세계가 바로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창조 세계이다. 또한 그것은 성령의 활동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의 거주민들이 성령을 받게 된 첫 징후는 그들이 모두 각자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 모양이 비록 다른 사람들 눈에는 ‘술 취한 자들’처럼 보였으나, 그들이 하느님의 큰일을 각자 삶 안에서 독특하게 표현하는 행위야말로 성령을 받은 이의 표상인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과 성령의 표시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고 말씀하셨는지 모른다. 

 

 

출처: 월간지 <성서와함께> 2007년 7월 376호 

http://www.with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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