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동 언어와 성경_이집트의 프타 신화로 본 ‘말씀을 통한 창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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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18-09-12 15:29 조회1,3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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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동 언어와 성경
이집트의 프타 신화로 본
‘말씀을 통한 창조’
배철현(교수 ∙ 서울대학교 ∙ 종교학과)
I.들어가는 글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우주의 창조 신화를 살펴보면 각양각색이다. 대부분 소위 ‘신들 간의 싸움’을 통해 창조가 이루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그리스 신화는 이러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 신화에는 신들 간의 싸움 내용이 없거나 숨겨져 있다. 성경에서는 오히려 ‘말씀으로 창조하였다’고 전한다. 이렇게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는 내용은 고대 근동의 다른 문화에서 찾을 수가 있는가? 아니면 성경만의 독특한 사상인가?
인식을 통한 창조와 창조의 능력을 보유한 말씀과 관련된 개념은 이집트의 창조 신화 중 멤피스의 프타(Ptah)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프타는 왕조 시대 이래로 이집트 정치의 중심지였던 멤피스의 주신인데, 주신전이 위치한 장소에 따라 ‘그의 (도시의) 벽 남쪽에 계신 이’로 불리기도 했다.
초기 기록부터 프타는 창조된 세계의 광물적 요소인 광석과 돌, 그리고 이들 광물을 가공하는 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프타는 고왕국 시대 부조에 묘사된 장인들이 쓰던 머리에 꼭 맞는 챙 없는 모자를 쓴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프타의 고위 신관은 ‘장인의 기예를 관리하는 우두머리’로 불리었다. 프타는 특히 대장장이, 조각가, 건축가의 수호신이었다. 프타가 이들을 관장한다는 점 때문에 프타는 매의 머리를 한 운철의 신 소카(Sokar)와 결합하여 ‘프타-소카(Ptah-Sokar)’가 되기도 하였으며, 신왕국 시대에 들어서는 돌을 관장한다는 점에서 타테넨과 결합하여 ‘프타-타테넨(Ptah-Tatjenen)’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신격은 프타가 물질계의 창조자로 숭배되었다는 사실은 설명해 줄 수 있지만, 인식과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형이상학적인 면과 관련된 특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 다행히도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특징과 관련된 유일한 자료가 남아 있다.
[프타 신상]
II. 샤바카 석비
대영박물관에는 멤피스의 프타 신전에 세워졌던 ‘샤바카석(Shabaka Stone)’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화강암 조각이 있는데, 이 조각이 새겨진 시기는 제25왕조의 파라오였던 샤바카 재위 기간(기원전 712-698년경)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파라오의 헌정사를 살펴보면 그 내용이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서가 비록 선대에 지어졌으되 좀이 먹어 그 시작과 끝을 알아 볼 수 없으므로 폐하께서 폐하의 아버지이시며 그의 벽 남쪽에 계신 프타의 거처에 새로이 공표하시노라.”
헌정사로 미루어 볼 때 이 석비에서 발견한 문서는 본래 파피루스나 가죽에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본이 한때 고왕국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지만,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 본 결과 샤바카보다 약 550년 정도 앞선 제19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2세 때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샤바카 석비]
샤바카석의 경우, 두 땅의 통일을 기리는 멤피스의 제의와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비석의 마지막 부분에 태초의 창조와 관련된 프타의 역할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앞선 이는 프타이며, 그가 바로 이 심장과 이 혀를 통해 모든 신들과 생명의 힘(카)에 생명을 불어 넣으신 존재이니라. … 그의 9주신은 아툼의 씨(정액)와 손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치아와 입술에 존재하나니, 이는 아틈의 9주신이 그의 씨(정액)와 손가락에서 나왔으되 모든 사물의 정체를 이르시고 슈와 테프누트가 나와 9주신을 낳은 이 입의 치아와 입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샤카바석의 창조 신화는 아툼이 현세(아툼의 9주신)의 물리적인 힘과 구성 요소로 진화한다는 사실보다는 그에 선행하는 창조적 개념과 말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샤카바석의 창조 신화는 창조주의 창조적 개념과 그것의 발화가 아툼의 진화로 이어지는 ‘빅뱅’을 초래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 샤카바석의 창조 신화는 프타를 창조주의 창조적 개념 및 말씀과 연관 짓고 있다. 그러나 창조와 관련되어 프타의 역할을 언급하고 있는 다른 문서와 마찬가지로, 프타 자신이 창조주라고 직접 언급하는 부분을 찾아볼 수는 없다. 오히려 프타를 창조적 개념과 말씀, 그리고 그 결과로 발생하는 아툼의 진화 사이에 존재하는 매개자로 보고 있다.
III. ‘생각’과 ‘말씀’으로 창조하는 프타신
프타는 대장장이, 조각가, 건축가의 수호신이었다. 이 점을 통하여 천지 창조에서 프타가 수행한 역할의 핵심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금속 가공, 조각, 건축 등과 같은 인간의 창조 행위는 - 예를 들어 조각상이나 건축물의 경우 - 모두 장인의 창조적 개념을 전제로 하며, 그 다음 금속이나 석재 같은 질료를 통하여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형상을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바로 장인이 가진 개념이나 기예 또는 지시 등이다.) 궁극적으로 질료를 변화(진화)시켜 완성된 조각상이나 건축물을 창조하는 것은 이집트인들에게 프타는 바로 이러한 진화를 가능하게 해 주는 신성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프타로 상징되는 힘을 통하여 창조주의 창조에 대한 최초의 개념(‘마음’, ‘인식’)과 그의 창조적인 지시(‘혀’, ‘말씀’)는, 아툼의 질료를 구체적인 세계로 변화시키는 창조를 이룬 것이다.
“그리하여 프타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모든 신성한 말을 다 마친 뒤 휴식에 들어갔다. … 그리하여 신들은 자신들의 형상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모든 것’의 창조와 ‘모든 말’을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신성한 말’은 직역하면 ‘신의 말’로 다른 한편으로는 성각 문자를 뜻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성각 문자는 현실세계의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개념의 상징이라는 이중성격을 갖는다. 창조된 세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신성한 말’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멤피스의 창조 신화를 작성한 신관들은, 창조된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성각 문자의 원초적인 개념을 성각 문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샤바카석 비문의 시작 부분에도 ‘아툼의 형상으로 진화’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여기서 ‘형상’이란 성각 문자가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인 것처럼, 물질계는 아툼의 질료가 ‘형상’으로 되는 것이다.
[샤바카 석비 필사]
멤피스의 창조 신화는 현존하는 고대 이집트 문서 중 가장 정교한 문서에 속한다. 이 문서가 쓰였던 람세스 2세 때는 왕성한 지적 활동과 창의성이 융성하고 장려되던 시대로서, 다양한 종교 문서가 작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창조주의 창조적 개념과 물질계의 창조 사이에 프타를 매개자로 두었다는 점은 그리스 철학의 ‘세계 형성자’ 개념보다 500년 이상 앞선 것일 뿐 아니라 이후 그리스도교 신학까지 영향을 주었다.
IV.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는 창세 1장과 요한 1장
성경에서는 창조주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고 있다. 멤피스의 프타 신화와 비교한다면, 성경 말씀에는 이집트의 ‘생각’과 ‘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창세1,3.6).
신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사건이 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 자신이 바로 ‘말씀’이었다. 그리스말로 쓰인 신약성경에서 ‘말씀’은 바로 ‘로고스’이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요한 1,1-2).
이렇게 멤피스의 창조 신화는 이집트의 사상 체계를 시초로 한 아주 오래된 오리엔트인들의 사상으로, 유구한 서양 철학의 계보와 그리스도교의 말씀을 통한 창조에 기여하였다.
출처: 월간지 <성서와함께> 2007년 8월 3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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