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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다시 읽기(12): 원죄 이야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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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경의세계 작성일18-07-19 11:11 조회3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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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다시 읽기(12) - 정용진 요셉 신부

 


원죄 이야기의 시작

 

우리는 2,23-25에서 하느님의 흔적이 없어져 버렸다는 느낌을 갖는다. 창세기의 처음부터 계셨던 ‘분리하시는 주 하느님’, 세상에 한계와 부족함을 놓으신 하느님의 모습이 온 데 간 데 없다. 아담이 한 말을 들여다보면 아담은 여인이 선물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그 선물을 주신 하느님도 망각한 듯 보인다. 남녀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조화를 말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모습이 담겨 있음을 본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서로 경계를 인정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형태가 아니라, 소유하고 점유하고 무엇보다(타인의 고유한 영역을 존중하기보다) 그 경계를 없애 버리려는 인간의 욕구가 담겨 있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의문과 아쉬움을 안고 이제 3장으로 넘어가 보자. 소위 ‘원죄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뱀의 견해를 따라간 원죄의 해석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죄(원죄)에 대한 고전적 해석은 그들을 유혹한 뱀의 말과 생각에 집중해 온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에게서 좋은 모든 것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지켜야 할 금지 사항도 있다. 그것을 어기는 대가는 죽음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분의 법을 지킬 때 행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과연 그 해석이 틀린 것일까? 물론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뭔가 허전한 구석이 있다.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되어 윤리적 판단의 규범과 기준을 갖게 되면 그 결과는 불행이다.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되고 죽음을 맞이한다. 선과 악의 열쇠를 쥔 지고의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살기를 원한다면 그분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그런데 정말 이런 논리가 뱀과 선악과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교훈일까?

 

3장의 원죄 이야기의 구조를 분석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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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분석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깐 ‘먹다’라는 동사의 쓰임에 대해 짚고 넘어
가면 좋겠다. 선악과 이야기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사는 ‘먹다(’ ākal)’이다. 무려 스물세 번이나 나온다. 여인이 “그것을 먹었다”(6절)라는 표현이 열두 번째이니, 전체를 볼 때 ‘먹다’라는 동사가 선악과를 먹는 행위에 중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먹다’라는 단어가 짧은 이야기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의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사람이 너무 많이 먹고자 한다는 것을 가리키고자 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원죄 이야기 또는 선악과 이야기의 구조를 살펴보면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도식과 유사할 것이다. 그러면 그것과 다른 구조 분석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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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구조와 두 번째 구조는 어떻게 다른가? 두 번째 도식은 첫 번째 도식과 달리 사람의 생각을 더욱 잘 드러낸다. 두 번째 도식은 “너 어디에 있느냐?”는 하느님의 물음을 중심축으로 양쪽의 대비를 잘 드러내는 장점을 지녔다. 그리하여 죄의 유혹과 그 결과(a-d : d′-a′)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또 다른 장점은 두 번째 도식의 중심에 있다. 첫 번째 도식과 달리 두 번째 도식에서는 이야기의 중심이 사람이 죄를 짓는 장면에 있지 않고, 하느님께서 아담(사람)을 찾는 소명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자신을 숨기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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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과 뱀의 첫 말
뱀의 교활함은 정말 놀랍다. 첫째, 뱀은 주 하느님의 말씀(명령) 가운데에서 오직 부정적인 것만 가져다 쓴다. 곧 주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한 한계만(“먹지 않을 것이다; 먹지 말라”) 부각한다. 이렇게 하여 뱀은 사람이 주 하느님에게서 받은 모든 선물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한계(금지)의 말씀에 사랑이 담겨 있음을 망각하도록 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모든 선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오직 율법만 남게 된 셈이다.

둘째, 뱀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인칭대명사의 변화를 준다. ‘너’와 ‘너희’는 다르다. ‘너’는 하느님 앞에 선 단일체로서의 사람을 의미하고, ‘나와 너’라는 관계성을 강조하며,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음을 부각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뱀의 말에 담긴 ‘너희’는 하느님과 사람의 거리를 멀게 한다. 아담과 하와가 누리는 단일성도 뱀에게서는 이미 ‘둘’로 깨져 있는 듯 보이게 한다.

셋째, 본래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선물과 함께 법을 주실 때 그분의 이름은 ‘주 하느님(엘로힘)’이었다. 그런데 뱀의 말에는 ‘주 하느님’이 없고, ‘엘로힘’만 있다. 우리가 앞서 본 것처럼 엘로힘과 주님은 항상 연관되어 있었다. ‘주님’을 뜻하는 거룩한 네 글자는 ‘YHWH’로, 그 뜻은 ‘만물을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뱀에게는 그런 분이 없다. 다만 ‘엘로힘’만 있다. 
(다음 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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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진 신부는 로마 우르바노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성서신학을 공부했고, 

   현재 청주교구 가경동 성당에서 사목하며 교구 성서사도직을 담당하고 있다.

 

 

 출처: 월간지《성서와함께》2014년 12월 465호.

<성서와함께> 홈페이지 www.with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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