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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몬드 브라운의 요한 핵심어 콕콕! (6)_믿다 · 믿게 되다 · 믿음을 가지다 / 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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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18-08-28 17:26 조회1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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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몬드 브라운의 요한 핵심어 콕콕!

 

고故 레이몬드 E. 브라운 신부는 가톨릭 성서학계의 지도적 신학자로 <신약 개론>, <요한 복음 개론> 등 많은 저서를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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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다 · 믿게 되다 · 믿음을 가지다

피스테우에인(pisteu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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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에는 ‘믿음(pistis)’이란 명사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요한1서에는 한 번, 요한 묵시록에는 네 번 등장). 이는 동사 ‘사랑하다'에서 보았듯이 요한이 동사와 행동을 선호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보면 ‘믿음’ 은 243번이나 쓰여 동사보다 많이 나타난다.
 ‘믿는 사람’ 을 뜻하는 분사형 표현 ‘호 피스테우온'은 신약성경 전체와 비교해 볼 때 거의 요한계 문헌에서만 나타난다(요한 3.16.18 참조: 사도 13,39 예외). 요한에게서 신앙인과 제자는 사실상 동의​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신앙은 근본 요인이기 때문이다. 파스(P35, ‘전부’ '모두’)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것도 이 점을 가리킨다. 요한이 명사보다 동사 피스테우에인을 선호하는 것은 그가 신앙을 내적 성향으로 여기지 않고 자발적 위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 중요 한 진술을 하실 때 ‘진실로’를 반복하는 것 역시 당신과 당신의 말을 신뢰하라는 요구이다.
  요한은 피스테우에인 뒤에 전치사 ‘에이스(eis)’를 자주 붙여 쓰는데 (요한 복음에 36회, 요한 1서에 3회, 다른 신약성경에 8회), 여기에서 그의 ‘믿 ’는 개념이 지니는 독특한 어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쓰는 예가 칠십인역 성경이나 일반 그리스어 작품에는 없다.
 요한계 문헌에서 피스테우에인 에이스는 어떤 사람을 믿을 때 쓰인다(1 요한 5,10 예외: ‘증언을 믿다’ ). 그중 두 번은 아버지를 가리키고, 서른한 번은 예수님이며, 네 번은 예수님의 이름이다. 하느님을 믿듯이 예수님을 믿으라는 동일한 요구가 나온다(요한 14,1: 41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예수님에게 ‘오다’ 라는 동의어가 자주 나온다(요한 6.35; 7,37의 병행구). 이 동의어는 요한의 신앙 개념이 지닌 역동성을 입증하는 다른 증거이다. 따라서 피스테우에인 에이스는 한 사람, 특히 예수님에게 ‘자발적으로 맡긴다’ 는 뜻으로 규정할 수 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믿다’ 또는 신뢰하다’는 뜻보다 더 넓은 의미가 들어 있다. 즉 예수님과 그분이 선포하신 바를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그분께 바친다는 의미이다. 내맡김은 감정적 표현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또 그분에 의해 제시되는 하느님의 요구에 응답하려는 의지를 포함한다(1요한 3,2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에게서 믿음의 우위성과 선행의 중요성은 부딪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요한 6,29 참조)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과 계명 안에 머무르겠다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요한 8,31: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1요한 5,10: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발전에는 여러 단계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요한은 참된 믿음, 구원의 믿음을 가리킬 때 피스테우에인 에이스를 사용한다. 하지만 요한 복음에서 발견되는 예외(2,23-24: 12,42-43)는 피스테우에인이 포함된 다양한 어구를 너무 날카롭게 구분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이 문제를 연구한 카멜롯(T. Camelot)에 따르면, 피스테우에인 에이스는 이와 대등하게 쓰인 ‘여격(간접 목적어로 쓰일 때의 격)이 붙은 피스테우에인'(요한 복음서에 20회. 요한 1서에 2회 등장)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후자의 문장 구조는 강조점이 다르다. 여격이 붙은 피스테우에인은 누군가 (모세, 예수, 아버지)와 어떤 것(말, 성경)을 믿을 때 쓰인다. 이 어구에서는 어떤 사람에게 맡긴다는 의미가 분명하지 않고, 어떤 메시지를 단순히 수용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뜻인 듯하다. 그러므로 몇몇 경우에서 복음사가는 자신이 판단할 때 만족스럽지 않은 믿음을 기술하는 데 이 어구를 사용한다(요한 6,30: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요한 8,31: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피스테우에인에 전치사 디아(dia)가 붙으면 ‘~때문에 믿다’ 는 뜻으로 쓰인다. 이 표현은 예수의 말씀이나 일 등 믿음의 근거를 포괄한다(요한 4,41: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요한 4,42: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요한 14,11: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물론 아무 목적어 없이 피스테우​에인이 쓰이는 경우도 많은데,이런 구문에는 의미의 층이 다양하다.
 요한 복음서에서 피스테우에인이 표징의 책이라 불리는 1-12장에 주로 등장한다는(98회 가운데 74회)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요한 14,10("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으시고, 그들이 좀 더 내맡기도록 애쓰신 것은 분명하지만(요한14.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그들에게 믿음의 토대는 이미 놓였다. 영광의 책에서 제자들의 응답으로 강조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의무를 완성하는 사랑이다.

 
​알다
기노스케인(ginoskein), 에디에나이(eidenai) · 오이다(o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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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에게 ‘믿다’와 '알다’는 어느 정도 바꿔 쓸 수 있는 말이다. 요한17,8의 후반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ginoskein)’과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병행한다. 요한16,7과 16,10을 비교하면, '알다’라는 동사(ginoskein, eidenai)와 ‘믿다'라는 동사가 흡사함을 볼 수 있다. 만약 ‘~에게 오다’는 말과 믿음 개념의 능동적 요소가 같은 뜻으로 쓰인다면, '알다’라는 말은 믿음에서 받아들인다는 요소와 일부 뜻이 같아진다. 우리는 이 동사​들을 포괄하는 의미론 영역에서 일부만 같다고 강조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아신다고 말씀하시지(요한 10.15 참조), 아버지를 믿는다는 말씀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직접 아시고, 그 앎이 그분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진다(요한14,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된 것이다”).
 요한계 문헌에서 ‘지식’ 이란 명사가 전혀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요한이 동사를 선호한다는 것을 거듭 볼 수 있다. 포테리는 ‘알다’를 뜻하는 두 동사를 구분하는 뚜렷한 사례를 지적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기노스케인은 지식의 획득을 의미하며, 사람이 오래 수고하여 얻게 된 경험적 지식의 영역을 포괄한다. 반면 에이데나이와 오이다는 ‘알게 되는 것’ 을 의미하지 않고 단지 ‘아는 것’, 곧 확신을 가진 즉각적 태도를 가리킨다. 스피크(Spicq) 역시 같은 유형으로 구분한다. 기노스케인은 지침을 통한 지식을 말하고, 에이데나이는 시각을 통한 지식을 말한다. 아보트(Abbott)도 기본적으로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기노스케인은 ‘~에 대한 지식을 얻다’로, 에이데나이는 ‘~ 대해 모두 알다’로 옮긴다.
 ​이렇게 구별하는 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인간적 수단을 통하여 얻으신 앎을 가리킬 때 기 노스케 인을 선호한다(요한4.1: “소문을 바리사이들이 들었다는 것을 알가1 되셨다”: 6,15: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그러나 복음사가가 예수님께서 인간적 수단으로 알게 되셨다고 생각하라는 뜻으로 말했다그I 항상 단정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요한 5,6에서 예수님께서는 병자가 오랜 기간 그렇게 있었다는 것을 아셨고, 16,19에서는 제자들이 당신께 묻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셨다. 이런 예는 일상적 앎인가, 아니면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는 신적 능력의 표현(요한 2,25: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인가? 우리는 기노스케인의 이러한 용법을 살필 때 에둘러 말하는 이유에 주의해야 한다. 6,69에서 베드로가 경험으로 얻계 된 깊은 영적 지식을 말하면서 기노스케 인을 사용하는 것이 좋은 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이데나이가 예수님께서 아버지 및 아버지와 관련된 것들에 대해 지니셨던 직관적 앎을 가리키는데 자주 쓰인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그러나 기노스케인이 에이데나이가 쓰였던 곳과 동일한 상황을 가리킬 때도 자주 쓰였다는 것을 이해하면 이러한 구별이 무너진다. 다음 예를 보자.

•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아신다: 에이데나이(7,29; 8,55)/ 기노스케인(10,15; 17,25)
•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이나 모든 사람을 아신다: 에이데나이(16,30; 18,4)/ 기노스케 인(2,24)
•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에이데나이(8,19 2회)/ 기노스케인과 에이데나이(14,7)
• 세상이나 죄인들은 아버지나 예수를 알지 못한다: 에이데나이(7,28; 8,19:15,21)/기노스케인(1,10; 16,3; 17,25; 1요한 3,1.6)

그러므로 ‘사랑하다’와 ‘보다’ 동사를 구별하려 했을 때 내렸던 결정과 마찬가지로, 많은 예외가 있다는 것이 최선일 듯싶다. 요한은 한 동사를 한 방식으로,다른 동사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
나 그것은 강조하려 한 것이지 명확히 구별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복음사가는 주석가들이 만든 그의 존재처럼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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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지 <성서와함께> 2012년 12월 441호 

http://www.with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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