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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다 - 창세기_에덴의 동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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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18-09-02 01:19 조회3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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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다 - 창세기

 

에덴의 동쪽​
배미향 에밀리아

 

배미향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언어임을 체험하며 이를 나누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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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마음을 잃어버렸다. 컴퓨터나 전자기구의 자동 버튼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보를 따라 성공 지상주의로 내달려가고 있지만 그 내면은 처참하게 허물어져 가고 있다. 투기열풍의 현장이나 쇼핑센터를 헤집고 다니고,때로 얼굴도 고쳐 보지만 한 인간으로서 진정한 가치를 외면한 채 아름다음을 잃어가고 있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CF 속에서도,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라고 외치는 무한 속도 속에서, 우리는 마음도 잃고, 사랑도 잃고, 영혼도 잃고 그래서, 심리적 유목민이 되었다. 우리에게 안식처는 어디인가”(MBC 드라마〈에덴의 동쪽〉기획 의도에서).


우리의 안식처를 묻는〈에덴의 동쪽〉드라마의 기획 의도를 읽으며, 무한 경쟁 시대에서도 마음 저 깊은 곳의 바람과 안식과 구원은 늘 인간의 희망임을 깊이 느꼈습니다. 세상이 팍팍해질수록,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만연할수록 우리는 더 깊이 갈망합니다. 세상의 드라마로 각색되어 문학 창작의 원천이 되었던 창세기 4장의 이야기는 오늘도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됩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 “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다”(창세 4,16)에서, 카인이 살았던 ‘에덴의 동쪽’ 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 라서 그런 건 아닐까요?


4,3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카인은 능부였고, 아벨은 가축을 치는 목자였나 봅니다. 그러니 둘 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아벨의 것은 기꺼이 굽어보시고 카인의 것은 굽어 보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형이 동생을 ​살해하는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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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평하셔야 할 하느님께서 형제를 불공평하게 대해 죄의 원인을 제공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는 말이지만, 그것은 성경을 글자 그대로 읽을 때 생길 수 있는 오해입니다. 또 어떤 분은 굳이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십니다. “카인은 정성이 부족했어요.” 신약성경에도 아벨이 “카인보다 나은 제물”(히브 11,4)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렇게 볼 여지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해석한 것이지 창세기 본문에는 그렇게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하느님께서 왜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시지 않았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형제 관계'라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모두 형제 관계를 맺고 같은 권리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지만, 누구의 것은 받이들여지고 누구의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삶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많이 가질 때, 한쪽은 성공하고 다른 쪽은 실패할 때 공동체에 위기가 온다는 것 입니다. 모든 이가 똑같은 삶의 여건을 가지고 태어나 살아갈 수 없는 삶의 실존 상황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이것 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때 자신이 가진 것을 되돌려 드릴 수 있고,받지 않은 것은 바칠 수 없으니 주어진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받으신다’ 는 표현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6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
을 들 수 있지 않느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물에 대한 하느님의 평가가 있고 난 다음,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 입니다.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립니다. 자신을 아벨과 비교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주목하고, 타인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대해 자존감을 잃어버립니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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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내 삶에 자존감을 가지라는 초대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카인은 ‘비교와 경쟁’ 을 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남에 비해 가진 것 없는 자신, 부모에게서 좋은 환경도 물려받지 못한 우리네 인생을 나타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을 보듬어 안아야 하는,어쩌면 ‘2등 인생’인 우리 모두를 카인이라고 이름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하느님께서 불공평하게 처리하셨는데 자존감을 가지라구요?


이런 생각이 든다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우리 삶의 현실로 옮겨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시어머니의 생일이 되자,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첫째 며느리는 내의, 둘째 며느리는 옥 목걸이를 선물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어느 것을 더 좋아하셨을까요? 물론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아마 옥 목걸이를 더 좋아하셨겠죠. 이때 카인의 처지가 된 첫째 며느리는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다. ‘늘 함께 살며 힘들어 하는 내가 드린 선물은 고마워하지도 않고,둘째 며느리가 선물한 것만 반겨 맞으니 화가 나네. 하지만 옥 목걸이를 꼭 가지고 싶어 하셨던 어머님께 동서가 선물을 해 드렸으니, 안 그래도 돈 쓸 일이 많았는데 잘 되었지 뭐. 그리고 내가 드린 내의도 어머님이 경로당 가실 때 꼭 입으셔야 하는 거잖아.’ 이런 자존감을 가진 첫째 며느리라면 결코 동서를 미워하거나 싸움을 벌이지는 않겠지요.

잘 나가고 인정받는 사람(아벨처럼 굽어보았기에 받아들여진 자)이 아니라 뭔가 남에 비해 부족하고 처진 것 같은 자신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처지를 카인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어쩌면 모든 인간은 이렇게 한계를 지닌 카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카인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끊임 없이 위만 바라보며 남과 비교하여 불평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작은 것이나마 다시 헤아려 감사하게 여기고 자기 삶에 자존감을 가지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자와 비교하여 열등감에 빠지거나 가진 자를 적대시하고 미워하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결국 환경과 세상을 원망하고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게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인생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 대며 불행을 자초하는 곤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하루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면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건강한 육신과 정신,성실한 삶의 태도로 내가 받은 모든 것을 감사히 여기며 살아갈 때, 세상의 외진 곳에 있다 해도 받은 것에 감사하며 자신의 하루를 봉헌 제물로 바칠 수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나의 제물을 그분께 드리는가? 아니면 가진 것에 감사하기보다 남보다 덜 주어졌다는 비교 의식으로 툴툴대며 나의 제물을 바치는가?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하루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8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16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다.  인간이 스스로 자존감을 잃으면 남이 잘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자존감을 잃고 자신을 아벨과 비교한 카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됩니다. 카인은 아우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자신마저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결국 이 이야기에는 나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삶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카인은 …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다.” 동쪽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하느님의 현존에서 멀어진 변두리 삶을 상징합니다. ‘에덴의 동쪽 놋’ 역시 지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놋’이라는 단어는 12절과 14절에 나오는 낱말 ‘헤매는’ 을 뜻하는 히브리어 '나드' 를 본떠 만든 것이 라고 봅니다. 즉 '유랑' 이나 '방랑' 을 뜻하여 안식과 평화가 없는 한없이 고독하고 소외로 가득 찬 비참한 삶의 땅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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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어 하느님께서 함께 살아가도록 만드신 이 세상에서, 인간은 형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이때 나와 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불어 가야 할 존재가 경쟁과 비교의 대상으로 전락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안식과 평화가 없는 비참한 삶의 땅,에덴의 동쪽 놋이 될 것입니다. 경제 발전에 따라 삶의 조건이 좋아진다고 우리는 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가난했던 6,70년대에 비해 우리는 결코 더 큰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상대적 빈곤감으로 인해 더 큰 허탈감과 상실감에 젖어 있습니다. 비교와 경쟁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작고 소박한 삶을 사랑하는 성실한 한 걸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새해는 이런 마음으로 출발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6셋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 이어 등장하는 카인의 자손들은 인간에 의해 파괴된 사회상을 드러냅니다. 반면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한 셋의 자손들을 통해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험악한 세상에도, 어느 구석에선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세상 구원을 위해 희생의 촛불을 밝혀 든 하느님의 사람이 있듯이 말입니다.


5,1아담의 족보는 이러하다. 3아담은 백삼십 세 되었을 때, 자기와 비슷하게 제 모습으로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5아담은 모두 구백삼십년을 살고 죽었다. 21에녹은 육십오 세 되었을 때, 므투셀라를 낳았다. 22므투셀라를 낳은 다음, 에녹은 삼백 년을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아들딸들을 낳았다. 23에녹은 모두 삼백육십오 년을 살았다. 24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 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  5장과 같은 족보를 읽을 때는 지루할 뿐더러 대충 읽으려는 유혹마저 느껍니다. 그러나 족보들은 그 족보와 관련된 여러 설화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특히 5​장에 등장하는 긴 족보는 이스라엘 선조들이 하느님에게서 특별히 선택 받았음을 나타내며,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앞으로 전개될 노아의 흥수 이야기, 아브라함 이야기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즉 족보는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이는 누구의 족보이다’ 라는 기본 틀에 여러 이야기를 포함시켜 긴 흐름을 갖는 구원사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때 나타나는 선조들의 긴 수명은, 성경 저자가 인류 역사를 측정할 수 없는 과거로 소급하기 위해 역사 이전의 시간 경과를 사람의 긴 수명으로 나타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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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들은 옛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더 장수한다고 믿었다. 기원전 1800년경 돌 위에 쐐기 문자로 쓴 이 수메르 왕의 목록에는 대홍수 이전에 통치했던 왕들의 수명이 1만 8백년에서 7만 2천 년으로 적혀 있 다. 애쉬몰린 박물관, 옥스퍼드.] 


이들의 긴 수명 중에서도 특별히 365년을 산 에녹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양력에서 ‘365’는 일 년을 나타내는 ‘완전수’입니다. 365년을 산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면서(창세 5,22),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창세 5,24) 사라졌는데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라고 창세기 저자는 말합니다. 여기서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는 말은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걸었던 에녹은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에 이릅니다.

 

 ​올 한 해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경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미카 6,8 참조) 살아가는 365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출처: 월간지 <성서와함께> 2009년 1월 394호 

http://www.with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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