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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다 - 창세기_일어나 베텔로 올라가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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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18-09-03 09:48 조회4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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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창세기

 

일어나 베텔로 올라가라
배미향 에밀리아

 

배미향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언어임을 체험하며 이를 나누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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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0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22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야곱은 영적 여정을 출발한 베텔에서 하느님께 서원합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돌보아 달라고 청한 다음 그 중 십분의 일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을 상대로 통 큰 거래를 한 셈입니다. 지금까지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사악과의 관계에서 그분을 알아 왔는데, 이제 “잠에서 깨어나듯”(28,26) 자신의 일상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알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이라는 3인칭에서 "당신”(28,16)이라는 2인칭으로 자신과 관계를 맺으신 하느님을 부릅니다. 낯선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부부 관계를 맺었을 때 서로를 당신이라고 부르듯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내 삶에 가장 적극적 의미를 지닌 실체로서 '나와 그'가 아니라 '나와 당신(너)'으로 관계를 맺으십 니다. 인격적인 하느님과 만난 것이라고 할까요. 그분은 이제 나의 대화 상대이며, 나와 함께 생활하는 분이십니다.


29,25그런데 아침에 보니, 레아가 아닌개 야곱이 라반에게 말하였다.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라헬을 얻는 대신 외삼촌 일을 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26라반이 대답하였다. “우리 고장에서는 작은딸을 맏딸보다 먼저 주는 법이 없다."  살다 보면 자기 꾀에 자기가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고향을 등졌던 야곱이 외삼촌 라반을 향해 외칩니다.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신부의 몸값을 위해 칠 년간 일하고 얻은 아내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신부의 아버지이자 외삼촌인 라반에게 된통 속은 것입니다.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야곱은 “목놓아 울었던”(27,38) 에사우와 똑같이 묻고 있습니다. 작은딸과 맏딸의 순서를 바꿀 수 없다는 라반의 말은 결국 맏아들의 권리를 가로챈 야곱에 대한 조롱입니다. 이렇듯 남에게 행한 바를 자신이 도로 받는 것이 삶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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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장 31절에서 30장까지는 야곱 설화의 중심 줄거리로 형제간에 벌어지는 경쟁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레아는 “주님께서 나의 괴로움을 보아주셨구나.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해 주겠지”(29,32)라고 하고, 라헬은 “언니를 시샘하며 ... ‘아이를 갖게 해 주셔요. 그러지 않으시면 죽어 버리겠어요’”(30,1)라고 말합니다. 레아와 라헬만이 아닙니다. 귀향해야겠다고(30,25 참조) 생각한 야곱이 라반 삼촌과 지금까지 일한 품삯을 놓고 따집니다. 자신의 몫을 챙기기 위해 삼촌과 조카는 속고 속이며 안간힘을 씁니다. 더 많은 몫을 갖기 위해 양과 염소의 수를 늘리는 야곱 이야기에는 짐승들이 교미할 때 받는 시각적 인상이 새끼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고대인의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눈여겨볼 점은 그 방법의 특별한 효과가 아니라 통념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복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영악한 목자로 장인의 계교에 상응하여 자신의 이 익을 결코 놓지 않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편애와 불공평, 갈등과 분쟁이 그치지 않지만 사람들의 삶에 깊이 작용하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자네 때문에 나에게 복을 내리셨더군”(30,27). “어젯밤 자네들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야곱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하셨네”(31,29). 이권을 양보할 수 없는 인간 사이에 하느님만이 화해와 용서의 자리를 만드십니다.


31,39“낮에 도둑을 맞든 밤에 도둑을 맞든 장인께서는 그것을 저에게 물리셨습니다. 40낮에는 더위가, 밤에는 추위가 저를 괴롭혀,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 했습니다. … 그런데 장인어른께서는 저의 품값을 열 번이나 바꿔 치셨습니다. 42제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두려우신 분께서 제 편이 되어 주지 않으셨다면, 장인어른께서는 저를 틀림없이 빈손으로 보내셨을 것입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라반에게서 받은 설움,특히 삯을 둘러싼 불의와 부정을 토로하며 분노합니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힘없는 약자의 설움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했던가요. 경제적 이권이라면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쟁취했던 야곱이 어찌된 일인지 라반에게는 수많은 사기를 당해야 했습니다. 사기를 당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프고 절망스러운지 야곱은 라반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러나 라헬에 대한 뜨거운 사랑,낯선 현실에서 겪은 깊은 고통을 통해 조금씩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야곱은 이제 과거의 사기꾼이 아니라 정직하고 성실하며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깨닫습니다. 20년 노동의 값비싼 대가였습니다. 수업료 치고는 꽤 비싼 편이었습니다.


그는 비뜰어진 관계를 바로잡아 정의를 세우고 복을 주시며, 공존하는 관계로 바꿔 주시는 하느님에 힘입어 귀향길에 오릅니다. 새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발걸음을 힘차게 옮깁니다. 그러나 귀향길에는 어제의 내 모습이 담긴 현실과 직면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곧 복을 빼앗긴 형님과의 대면입니다. 야곱은 에사우를 만나려고 준비합니다. ‘형에게 자기보다 먼저 심부름꾼들을 보냄”(32,4)니다. 그리고 “몹시 놀라고 걱정이 되어, 자기 일행과 양과 염소, 소와 낙타들을 두 무리로 나눕”(32,8)니다. 여차하면 한 무리라도 건질 속셈입니다. “그러고 나서 야곱은 기도하였”(31,10)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은 참 변하기 힘든 존재인가 봅니다. 어렵고 힘들 때 세상을 살아가는 참 모습이 보인다던데,이런 상황은 온전히 하느님께 매달리며 의탁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나름대로 꾀를 다 쓴 후 기도한 것이니까요. 

 

그는 기도하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정직하게 들여다봅니다. “사실 저는 지팡이 하나만 짚고 이 요르단 강을 건녔습니다”(32,11). 모든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주님의 과분한 자애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질대로 기도합니다. “ ‘내가 너에게 잘해 주겠다.’ 하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32,10)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꼭 지키셔야 한다는 식으로 자기 내면의 두려움을 내보이며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그리고 형에게 줄 선물을 앞세옵니다. 야곱의 죄의식이 얼마나 컸는지는 2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구절을 직역하면 ‘얼굴’ 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선물로써 내가 그의 얼굴을 무마해야지. 그런 다음 내가 그의 얼굴을 보게 되면… (땅에 엎드린) 나의 얼굴을 들어줄지도….” 우리는 흔히 잘못했을 때 볼 낯이 없다’ 또는 멀굴을 들 수 없다’ 고 표현합니다. 야곱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32,23바로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건널목을 건녔다. 24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이끌어 내를 건네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25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27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야곱(yaaqob)이 야뽁(yabboq)에서 씨름(yeabeq)한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내면의 죄의식, 께름칙한 문제를 건너갔으면 합니다. ‘건너다’ 는 동사가 세 번이나 나오는데, 이제 야곱은 모두를 건네 보내고 혼자 남았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어느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와 씨름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홀로 서 있는 단독자입니다. 그 누구도 나 대신 회개할 수 없고, 믿을 수도 없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내와 자식, 재산을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를 뒤로 한 채 홀로 남아 있는 순간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사실 야곱은 인간 에사우와 생긴 문제로 고민합니다. 그러나 정작 씨름은 다른 이와 합니다. “하느님과 겨루어 이겼으니”(32,29)라는 것으로 보아 야곱은 하느님과 씨름한 것입니다.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 관계를 바로잡기 전에 씨름을 해야 할 상대는 하느님이었습니다. 어떤 인간관계보다 중요한 일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인간관계도 바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살면서 사람끼리 부대끼며 생겨난 문제들을 먼저 하느님 앞으로 가져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도 야곱의 고유한 성격이 다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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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느 들라크루아, 야곱이 천사를 만나 씨름하다, 1850, 생 술피스 성당.]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32,27) 하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야곱의 씨름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하느님의 신비에 직면한 신앙인의 영성 투쟁’과 ‘끊임없는 기도의 효력’으로 해석합니다.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32,32). 베텔의 밤(어둠)에서 시작한 여정에서 야곱은 비록 다리를 절뚝거리지만 그 위로 해가 떠오릅니다. 그는 이제 사기꾼 야곱이 아니라 20년간 쌓인 형제 간의 어둠을 털어 버리고 형과 재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녕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주인의 얼굴을 뵙게 되었고”(33,10), 야뽁 강은 하느님의 얼굴을 뵙기까지 우리가 건너야 할 강이며 영적 씨름입니다.

 

34장은 디나가 성폭행을 당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의 실제 주인공은 디나라는 여성인데, 전면에 흐르는 것은 통혼을 둘러싼 혼인 문제와 가문의 영광(?)을 위한 남자들의 보복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흘러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물론 성경 저자는 아브라함이나 야곱 선조가 가나안 사람들과 통혼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고 강조하지만,이 이야기에서 생각해 볼 것은 정작 피해자인 디나의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또 그의 생각이나 감정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딸이 겁탈 당했는데도 야곱은 침묵합니다. 당사자를 소외시킨 채 누이와 집안의 명예를 지킨다고 살인과 약탈을 감행한 야곱 아들들의 소행은 과연 정당한 폭력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슬프게도 크게는 내전부터 작게는 자살에 이르기까지 성폭행을 당한 숱한 여성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현실은 삼천여 년이 지난 오늘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35,1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베텔로 올라가 그곳에서 살아라.”  야곱은 스캠 성읍 앞에 천막을 치고 그곳에서 살고자 땅을 사기까지 했습니다(33,19). 그 땅에서 딸이 성폭행을 당하는 엄청난 사건을 겪습니다. 성읍의 화려한 삶에 빠져 들고자 자신이 돌을 세우고 하느님께 맹세한 땅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일어나 베텔로 올라가 그곳에 제단을 만들어 너의 형 에사우를 피해 달아날 때 너에게 나타난 그 하느님에게 바쳐라.” 인간은 자신이 서원한 바를 잊고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시고 어디에 머물러야 영적으로 살 수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베텔은 스캠보다 남쪽에 있는데도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올라가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비록 정착민의 보복이 두려워 떠돌이 유목민으로서 생존하기 위해 침묵했던 야곱이었지만 이제 정녕 어디로 향해 가야 할지 깨달았습니다. 아래로 흐르기 쉬운 삶을 추슬러 위를 향하는 것, 하느님께 서원한 바를 행하며, 하느님께 봉헌한 제단을 중심으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아 한다고 딸의 희생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야곱은 “스캠 근처에 있는 향엽나무 밑에”(35,4) 자신의 욕망과 아욕을 다시 한 번 묻어 버립니다. “너의 이름은 야곱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야곱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제 너의 이름이다”(35,10). 그분께서는 새 이름 ‘이스라엘’ 로 나를 부르십니다. 

 

 

 

출처: 월간지 <성서와함께> 2009년 6월 399호 

http://www.with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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