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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43)_​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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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19-04-17 02:23 조회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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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딸이다

이종훈 마가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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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물에 온몸을 담그고 싶은 계절이 가까이 왔습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면서 더러움을 씻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물은 대부분의 종교 예식, 특히 정화와 새로 태어남을 상징하는 예식에서 늘 이용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 예식에서도 그랬듯이 말입니다. 물과 더욱 가까워지는 이 계절에 복음서가 전해 준 주님의 세례(마태3,13-17)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3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14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15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16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7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레를 받으시려고”(13절)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고 성경은 전해 줍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 밝히듯이(마태 3,6; 마르 1,4-5 참조), 그것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세례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죄의 용서는 물론이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지만,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죄를 끊겠다고 공동체 앞에서 결심하는 일종의 상징적 행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세례를 베풀었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세례 운동은 그 당시 사회에 꽤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례 운동에 참가하셨던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요한 3,22 참조). 이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교회의 신심 운동’이나 세상에서 벌이는 영향력 있는 ‘사회 계몽 운동’과 유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태어나고 자라나면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셨겠지요.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 곧 하느님이셨으니까 하느님의 시각으로 세상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셨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특히 불의와 인간의 죄악으로 빚어지는 고통에 대해서요. 그러던 중 세례자 요한이 세례 운동을 벌이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운동에 참여하셨던 것 같습니다. 루카 복음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최소한 먼 친척(루카 1,36.57-64 참조)으로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종사촌’쯤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하튼 두 사람 사이는 친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이 세상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마음을 구체적인 활동으로 표현하는 데 방아쇠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난 뒤 서른살쯤에 활동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루카 3,23 참조). 예수님의 활동이 처음부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인류 구원 사업이었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것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사람들을 가엾게 생각한 마음에서(마태 9,36 참조) 비롯한 활동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15절)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죄를 용서받기 위한 세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의 표시로 받는 요한의 세례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받으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곧 당혹스러워집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믿게 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네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마태 3,13-17; 마르 1,9-11; 루카 3,21-22; 요한 1,24-28 참조),세례를 받으신 것은 역사적 사실임에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죄를 지으셨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1요한 3,5).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이 참 인간이시고, 참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받는 모든 유혹을 다 받으셨지만 결코 죄를 범할 수 없는 분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강에 들어가시어 요르단강물이 한번에 정화되었다고 해석합니다. 즉 요르단강물을 세례수로 축성하신 셈입니다. 또 이것은 죄 많은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의 표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되시기 위해 우리와 철저히 같은 처지에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언제, 몇 살 때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고귀한 사명, 즉 하늘 나라 또는 복음 선포의 사명을 깨달으셨을까요? 설마 태어나시자마자 당신의 신분과 소명을 아신 것은 아니겠죠. 그렇다면 인간이 아닐 테니까요. 열두 살 때 부모와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성전을 둘러보면서, 그리고 성전에서 율법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번뜩 그것을 깨달으셨을까요? 그야 잘 모르죠. 여하튼 언제 그 사실을 깨달으셨는지 모르지만 당신 생애의 어느 순간, 아니면 어느 정도의 시간에 걸쳐서 점차 깨달아 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성장해 가면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을 접하게 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참회와 구원을 위해서 그 운동에 동참하는 것을 보고 당신도 참여하시게 된 것 같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하는 고해성사와 비슷하게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었는지, 마음속으로 알아내고 깊이 뉘우치는 것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여하튼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 자체는 이미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도 고민하셨겠죠. 우리가 고해성사 보기 전에 성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성찰하셨을지 궁금해집니다. 죄를 생각해 내셨을까요? 우리처럼 서너 가지 단골 메뉴(?)만 금방 알아내고 나머지는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에 몰아넣으셨을까요? 아마 아무리 생각해도 죄가 생각나지 않으셔서 고통스러우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시다가 우리처럼 ‘이번에도 단골 메뉴 외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기억 못하거나 죄인 줄 모르고 행한 것도 분명히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을지 조심스럽게 상상해 봅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어서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에 밀어 넣기도 하지만요. 이것이 모고해가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도저히 입으로 발설할 수 없는 우리는, 그 작은 유혹도 이겨낼 수 없는 참으로 연약하고 불쌍한 존재입니다.

 

다시 예수님의 성찰 시간을 상상해 봅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그분의 양심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며칠을 고민하시면서 결국에는 ‘도저히 기억은 나지 않고 잘 알 수는 없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적이 분명히 있겠지’ 하며 요르단강으로 발길을 옮기지 않으셨을까 상상해 봅니다.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남들이 말해 줘서 기억할 수 없었던 죄를 기억하기도 하고, 죄인 줄 몰랐던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게다가 죄인 줄 알면서도 고해성사 때 그것을 감추기도 하는 우리의 처지와 비교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도저히 같을 수 없는 순수함과 겸손함을 지니셨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무지와 연약함에서 죄를 감추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기억할 수 없는 과거와 무의식마저 남김없이 아버지께 모두 보여 드리고 아버지의 처분에 당신을 맡기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뢰가 없으면 나올 수 없는 결단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참 인간이시며 참 하느님이셨던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사랑으로 발가벗은 당신 전부를 두려움 없이 송두리째 맡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나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해 주십니다. 이런 분이시니 아버지 마음에 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들이겠죠.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절)

그런데 이렇게 겸손하고 순수하며 아버지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분이 저 십자가 위에 죄인으로 달려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우리는 이렇게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큰 대가를 치르고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솔직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그만큼 우리의 죄가 크다고 온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까? 이토록 순수하고 겸손하고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아들을 죽여야만 우리가 저지른 죄의 벌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죄가 크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죄인인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왜냐고요? 사랑하니까요. 우리의 죄는 하느님의 큰 사랑 앞에서는 있으나 마나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이런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으며 모질디모진 마음을 가진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이토록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거나 앞으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미친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그토록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켜서까지 당신의 사랑을 우리가 알게 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고자 하시는 영원한 아버지, 어머니이십니다.

 

그러니까 ‘나 같은 놈이 무슨 자격으로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나’ 하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마음을 두 번 아프게 해 드리는 겁니다. 나의 죄로 한 번, 그리고 온몸을 바쳐 그 죄를 없애 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외면하여 또 한 번,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우리에게도 들려 주시고자 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딸이다.” 

   

 

출처: 월간지 <성서와함께> 2008년 7월 388호 

http://www.with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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