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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44)_우리를 잘 아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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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이블톡 작성일19-04-17 02:32 조회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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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

우리를 잘 아시는 예수님

이종훈 마가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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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 역사적 인물들이나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접하곤 합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아마 그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어떻게 그것을 이겨냈는지일 것입니다. 간접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얻는 삶의 지혜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들의 삶을 통해 받는 위로입니다. ‘아하!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었구나’,‘저 사람도 실패한 적이 있었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처럼 유혹에 시달리셨습니다. 요한 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신 뒤에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고 전합니다. 루카 복음서가 전하는 광야의 유혹(루카 4,1-4.9-13) 부분을 읽어 보겠습니다.

 

1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2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3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 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9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 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보시오. 10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11‘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12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3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하느님의 아들

우리에게도 삶이 크게 변하는 계기가 있는 것처럼, 예수님에게도 세례 때의 체험, 특히 물에서 나오시면서 들으셨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루카 3,22)이라는 말씀이 가슴 깊이 남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체험을 통해 앞으로의 당신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택하신 장소가 광야였습니다.

 

광야! 그곳은 황량하고 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으며, 자신과 마주하는 곳, 그래서 하느님을 만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 속에서 나타나신 하느님을 만난 곳(탈출 3,1-6 참조),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을 찾아 40년을 헤매며 반항과 복종을 거듭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순수하게 키워 나갔던 곳도 광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선조들처럼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기 위해 성령의 인도에 따라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오랜 시간 단식하며 숙고하고 기도하신지라 기진맥진하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악마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께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처럼, 하느님께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권위에 흠집을 낼 수도 있는 것이고, 어쩌면 우리의 신앙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이런 분을 두고 전지전능하신 분, 나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던(요한 3,16) 하느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것을 서슴지 않고 줄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은 그 사람의 어려움과 고통을 나누고, 더 나아가 그와 함께, 그를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간혹 연인 사이였던 남녀가 헤어지게 되면 그동안 주고받았던 선물을 돌려주고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그’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사랑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유혹의 고통을 몸소 겪으시면서 당신의 참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보답을 원하실 리 없고, 설령 우리가 등을 돌려도 그분은 계속해서 우리를 바라보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 계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에는 언제나 유혹이 있고 그분께 가까워질수록 유혹도 거세집니다.

 

악마는 식욕을 이용해서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의 의미를 해석해 주려 했습니다. 돌 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라는 악마의 말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에게는 이미 주위의 돌들이 모두 빵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악마의 말로 예수님은 더욱 갈등했을 것입니다. 배고픈 고통보다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능함은 그분의 무한한 사랑으로 드러나고, 그 사랑은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요한 15,13) 진정한 우정으로 표현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배가 부를 때는 어떤 음식을 보아도 식욕이 생기지 않듯이, 건강하고 주변의 모든 일이 잘 될 때 우리 신앙은 큰 도전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기거나 하는 일마다 잘 안 될 때,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리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 정말 계시는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간은 참으로 외로운 시간입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도 어쩔 수 없는 시간일지 모릅니다. 그럴 때 유혹도 거세집니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이 시간은 하느님과 깊은 우정을 나누고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에는 언제나 유혹이 있고 그분께 가까워질수록 유혹도 거세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 동안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셨다면 하느님의 가장 큰 사랑의 징표인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앞둔 시점,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 14,36)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분을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마는 자신의 안위를 돌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뛰어내려 보라고 다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신적인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40일 동안 단식하시고 이미 수차례 유혹과 맞서시느라 지친 예수님에게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을 지켜 주신다는 말씀을 한 번만 확인해 보라는 제안이 얼마나 달콤하게 들려왔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여기시는지 딱 한 번만 확인해 보면 모든 것이 확실해지고,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을 잘 해 나갈 수 있을 텐데.’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도, 느낄 수도, 그분의 뜻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믿음으로 보고 알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캄캄한 것이라고 했나 봅니다. 우리에게 믿음은 죽음과도 같습니다. 보이는 것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없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당신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고, 그 불안이 우리 삶의 뿌리 깊은 불안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불안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이겨 나가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고 말씀하셨듯이 말입니다.

 

단순한 믿음

이런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는 성경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한 점, 한 획도 바뀔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믿고 따르겠다는 그분의 순결한 마음과 아버지를 향한 지순한 사랑의 대답입니다. 참으로 단순한 믿음입니다. 보지 않고도, 확인하지 않고도 믿고 신뢰하는 마음 안에는 악마의 소리가 끼어들지 못합니다. 그분의 단호함에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갑니다.

 

그러나 유혹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유혹은 그분의 공생활 내내 계속되었을 것이고, 특히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더 심각하고 격렬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인간의 죄악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그런데 이 구절은 시편 22,2의 말씀으로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노래한 시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바로 그 시간, 그토록 다정하게 당신의 청원을 들어 주시던 아버지 하느님(요한 11,41-42 참조)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시간이 하느님을 신뢰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을 오직 그분의 말씀만으로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보고 느끼고 그분의 뜻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책에서 짧은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가게가 있었는데, 그 가게에서는 무엇이든지 다 판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무엇이든 다 살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정말 세상 온갖 것이 다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이상한 상품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상품은 ‘당신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품에는 가격이 없었습니다. 가게 주인에게 가격을 물었더니,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구원’의 가격은 ‘당신의 안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잘 몰라서 자주 망설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자주 실패하였지만, 우리의 주님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1베드 1,8).

 

주님,

때때로 저희는 유혹에 시달리곤 합니다.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만나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는 

더욱 심한 유혹에 시달리며 혼란스럽습니다.

결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유혹에 시달리는 저희는 참으로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저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고 싶어하고

그렇게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 그것이 자신의 뜻이었음을 알게 되곤 합니다. 

자신은 속여도 하느님만은 속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만이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완전하시고,

영원히 변치 않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유혹에 넘어가 실패할 때마다 즉시 주님께 달려가 

용서를 청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저희의 비참한 현실에 함께 해 주시고 

저희와 같은 처지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실패를 통해 주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키워 주십니다. 

오직 단순하고 투박한 믿음과 신뢰만이 

당신을 온전히 가질 수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죄인들의 피난처이신 성모님,

저희를 모든 유혹에서 보호해 주시고 

유혹에 빠져 실패할지라도

주님께 곧장 달려가 용서를 청할 수 있게 하소서. 아멘. 

    

 

출처: 월간지 <성서와함께> 2008년 8월 389호 

http://www.with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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